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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미학으로 풀어보는 술과 예술의 관계: 무관심적 쾌와 도취의 경계

by 아빠띠띠뽀 2026.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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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예술은 종종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 전시를 본 뒤와인을 기울이며 작품을 논하고, 공연이 끝난 뒤맥주잔을 맞대며 여운을 정리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두 가지 쾌락이 겹쳐있다. 하나는 술이 주는 감각적 쾌락이고, 다른 하나는 작품이 주는 미적쾌락이다. 칸트는 미적판단의 핵심을‘무관심적쾌’에서 찾는다. 즉 아름다움을 느낄 때 우리는 대상을 소유하거나 사용하려는 욕망과 거리를 두고, 형식이 주는쾌를 자유롭게 맛본다. 반대로 술의 쾌는 대개 신체상태를 직접적으로 변형시키며 욕망을 부드럽게 밀어 올린다. 이 글은 칸트의 미학개념(무관심성, 목적 없는 합목적성, 공통감각)을바탕으로 술이 예술경험을 풍부하게 만드는지, 혹은 미적판단을 기분의 판정으로 무너뜨리는지를 세밀하게 가른다. 그리고‘도취를 배제한 미’가 가능한지, 또한‘적절한 도취가 열어주는 대화’ 가칸트적 공통감각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까지 정리한다.

 

칸트 미학으로 풀어보는 술과 예술의 관계: 무관심적 쾌와 도취의 경계 이미지

아름다움의 쾌락은 왜 ‘무관심적’이어야 하는가

칸트가 미학에서 가장 단호하게 그어 놓은 선은, 아름다움의 쾌락이 단순한 감각적 쾌락과 같지 않다는 점이다. 맛있는 음식, 향기로운 술, 몸을 편안하게 하는 온도는 분명 즐겁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신체의 상태 변화에 직결되며, 욕구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반면 아름다움의 판단은 “내가 그것을 갖고 싶은가”와는 다른 층위에서 발생한다. 칸트는 이를 무관심적 쾌라고 불렀다. 여기서 무관심이란 차갑게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소유·사용·이익 같은 사적 목적을 잠시 내려놓고 대상의 형식이 주는 즐거움을 자유롭게 맛본다는 뜻이다. 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 꽃이 우리에게 어떤 효용을 주는지 계산하지 않는다. 그림을 아름답다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 판단은 ‘내게 득이 되느냐’가 아니라 ‘그 형식이 마음의 능력을 조화롭게 움직이느냐’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술은 곧바로 철학적 질문을 불러온다. 술은 몸을 직접 건드리는 기호품이고, 감각적 쾌락의 대표 격이다. 술이 들어간 순간 사람의 기분은 흔들리고, 말은 가벼워지며, 긴장은 풀린다. 이 변화는 예술 감상에 도움을 줄 때도 있다. 경직된 태도가 느슨해지면 작품의 리듬이 더 잘 들어오고, 대화가 수월해지며, 여운을 정리하기도 편해진다. 그러나 바로 그 편안함이 미적 판단을 ‘무관심적 쾌’가 아니라 ‘기분 좋은 상태의 확인’으로 바꿔버릴 위험도 있다. 칸트의 관점에서 이는 결정적이다. 내가 작품을 좋다고 말한 이유가 작품의 형식 때문인지, 아니면 술이 만들어낸 기분 때문인지가 분리되지 않으면, 미적 판단은 설득력을 잃는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단순한 개인 취향의 독백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동의를 요청하는 방식으로 말해진다고 보았다. “나는 좋다”에서 멈추지 않고 “너도 좋다고 느낄 수 있다”라고 기대한다는 뜻이다. 물론 강요는 아니지만, 그 판단에는 보편 타당성에 대한 암묵적 요구가 들어 있다. 그런데 술이 개입하면 이 요구가 흐려지기 쉽다. 취기 속에서는 공통의 기준을 찾기보다 분위기에 동조하거나, 반대로 분위기에 반발하는 식으로 판단이 요동친다. 그러므로 술과 예술의 관계를 칸트로 읽는다는 것은 금주를 설교하는 일이 아니라, 미적 판단이 성립하는 조건을 다시 점검하는 일이다. 술이 그 조건을 보조하는지, 아니면 조건을 해체하는지, 그 경계선을 분명히 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도취가 개입할 때: 목적 없는 합목적성과 공통감각은 어떻게 흔들리는가

칸트는 아름다움을 “목적 없음에도 합목적적으로 보이는 형식”에서 찾는다. 즉 어떤 대상이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어도, 마치 우리 인식 능력에 딱 맞게 짜인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쾌를 경험한다. 이때 작동하는 것은 이해력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다. 작품이 강제로 결론을 주입하지 않는데도, 우리의 마음은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의미를 엮어내며,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 그런데 술이 들어오면 이 유희의 리듬이 바뀐다. 상상력이 더 과감해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고, 사소한 요소가 과장되어 의미를 띠기도 한다. 문제는 그 과감함이 ‘자유로운 유희’인지 ‘통제 불능의 확장’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칸트적 미학에서 자유는 방임이 아니라, 능력들이 조화롭게 맞물리는 상태다. 술이 조화를 돕는 선에서 머물면 감상이 부드러워질 수 있지만, 조화를 깨뜨리면 유희는 곧 산만함으로 변한다.

또 하나의 핵심은 공통감각이다. 칸트가 말한 공통감각은 상식의 뜻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한다고 가정되는 감각의 소통 가능성이다. 미적 판단은 논증으로 강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적인 느낌으로만 끝나지도 않는다. 우리는 작품을 두고 서로의 느낌을 비교하고, 왜 그렇게 느꼈는지 설명하며, 때로는 견해가 바뀌기도 한다. 이 과정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공통감각이다. 술은 이 과정에 양면적으로 작용한다. 한편으로는 대화를 열어준다. 말의 문턱을 낮추어, 작품 앞에서 멈칫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느낌을 더 쉽게 꺼내게 한다. 이런 점에서 술은 공통감각의 ‘발화’를 돕는 장치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의 품질을 떨어뜨린다. 이유를 세우기보다 단정이 늘어나고, 섬세한 차이를 짚기보다 과장된 평가가 앞서며, 타인의 경험을 경청하기보다 분위기를 지배하려는 말이 튀어나온다. 공통감각이 소통의 가능성이라면, 과도한 취기는 그 가능성을 ‘소리의 경쟁’으로 바꾸기 쉽다.

그렇다면 칸트적 기준에서 술은 언제 예술 감상을 돕는가. 핵심은 술이 미적 판단의 자리를 ‘대체’ 하지 않을 때다. 예컨대 작품을 본 뒤의 술 한 잔이 여운을 정리하고 대화를 이어주는 보조 역할로 머문다면, 오히려 판단은 더 정교해질 수 있다. 감상이 말로 옮겨지며 자신의 느낌이 정리되고, 타인의 관점과 충돌하면서 애매한 지점이 드러난다. 반대로 술이 감상의 출발점이 되어 작품을 보기 전에 이미 감각을 흐리게 하거나, 작품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 양념’으로만 작동하면, 판단은 쉽고 빠르게 기분의 판정으로 기울어진다. 칸트가 지키려 했던 무관심성은 바로 여기서 무너진다. 내가 아름답다고 말한 순간, 그 말이 작품의 형식을 향한 것인지, 술이 만든 신체 상태를 향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결국 칸트 미학에서 술의 문제는 단순히 취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미적 판단의 근거가 어디에 놓이느냐로 정리된다. 술이 감각의 문을 조금 열어주되, 형식의 감상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면, 그것은 판단을 돕는 주변 조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술이 쾌락의 중심에 서서 작품을 ‘내 기분을 좋게 만드는 도구’로 바꾸어버리면, 미적 판단은 욕망의 언어로 흡수된다. 칸트가 말한 아름다움의 존엄은, 바로 그 흡수로부터 예술을 지키려는 시도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칸트가 제시하는 실천: ‘도취를 쓰되, 판단을 넘기지 말라’

칸트의 미학을 술과 연결해 읽으면, 가장 현실적인 결론은 의외로 절도 있는 태도로 모인다. 술을 악으로 몰아붙일 필요도 없고, 술을 예술의 비밀 열쇠처럼 숭배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역할 분담이다. 술은 기분을 바꾸고 관계의 긴장을 풀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판단은 그와 다른 자리에서 성립해야 한다. 무관심적 쾌는 욕망의 부정이 아니라, 욕망의 지배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능력이다. 예술을 만날 때 그 능력이 살아 있어야, 우리는 작품을 소유물이나 자극제로 보지 않고 형식의 세계로 받아들일 수 있다. 술이 이 능력을 약화시키는 순간, 미적 판단은 공통감각을 잃고, 결국 ‘내 기분이 좋으니 좋은 작품’이라는 단순한 결론으로 미끄러진다.

따라서 실천적 기준은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감상과 음주의 순서를 조절하는 것이 유리하다. 작품을 먼저 맑은 상태로 만나고, 술은 이후의 대화나 여운의 정리에 두는 편이 칸트적 조건에 더 가깝다. 둘째, 취기 속에서의 감동은 기록하되 판정은 유예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술자리에서 떠오른 해석이나 찬사는 흥미로운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보편 타 타당성을 요구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셋째, 공통감각을 지키는 대화의 윤리가 필요하다. 타인의 감상을 ‘틀렸다’고 몰아붙이기보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 물어보고 비교하며, 내 감각의 편향을 스스로 점검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술이 이 대화를 부드럽게 할 수는 있어도, 대화의 기준을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칸트가 미학에서 지키려 한 것은 예술을 둘러싼 인간의 존엄이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말할 때, 그것은 단순한 신체 반응이 아니라 서로에게 말을 걸 수 있는 능력, 즉 경험을 보편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시도다. 술이 그 능력을 살려주는 선에서 머문다면, 술은 예술의 적이 아니다. 하지만 술이 그 능력을 마비시키고, 판단을 기분의 부산물로 만들면, 예술은 ‘함께 말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 ‘각자 흥분한 채 흩어지는 자극’으로 축소된다. 결국 칸트적 결론은 단순하다. 도취를 쓰되, 판단을 넘기지 말라. 술은 곁가지로 남고, 예술의 중심에는 형식과 공통감각이 서야 한다. 그때 술과 예술의 만남은 낭만도 금욕도 아닌, 품격 있는 즐거움으로 유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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