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에게 세계는 본질적으로 평온하지 않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의 계획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원하게 만드는 맹목적 힘, 곧 ‘의지’이며, 의지는 충족되는 순간 곧바로 다음 결핍을 낳는다. 그래서 삶은 결핍의 불안과 충족의 허무 사이를 오가며, 고통이 기본값처럼 깔린다. 이런 세계관에서 술과 예술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고통의 기계가 잠시 멈추는 통로로 이해된다. 술은 감각과 정서를 빠르게 변형시켜 욕망의 날을 무디게 하고, 예술은 관조의 상태를 통해 의지의 요구로부터 잠깐 거리를 확보하게 한다. 그러나 두 통로는 결말이 다르다. 술의 도취는 대개 짧고 다음 날의 반동을 남기기 쉬운 반면, 예술의 관조는 의지에서 벗어난 ‘순수한 인식’의 경험을 통해 보다 정교한 휴지를 제공한다. 이 글은 쇼펜하우어의 핵심 개념인 의지, 표상, 관조, 미적 구원이라는 틀로 술과 예술의 관계를 분석하고, 술이 예술적 몰입을 돕는 순간과 예술을 마취로 전락시키는 순간을 구분한다. 나아가 고통을 ‘잊는’ 도피가 아니라, 고통을 ‘다루는’ 삶의 기술로서 절제와 성찰의 의미까지 함께 정리한다.

고통이 기본값인 세계에서: 의지와 도피의 유혹
쇼펜하우어가 남긴 문장들은 어둡고 냉정해 보이지만, 그 냉정함은 인간 경험을 과장 없이 드러내려는 태도에서 나온다. 그는 인간이 행복을 향해 전진한다고 믿는 낙관을 의심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대부분 어떤 결핍이 잠시 해소된 순간에 불과하며, 해소는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배고픔이 채워지면 곧 다시 허기가 찾아오고, 인정 욕구가 충족되면 더 큰 인정이 필요해지며, 사랑이 안정되면 불안은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의지는 멈추지 않고, 의지가 멈추지 않는 한 고통도 멈추지 않는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고통은 단지 불운의 결과가 아니라,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구조적 운명에 가깝다. 그래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잠시 멈출 수 있는 장치”를 찾는다. 바로 그 지점에서 술과 예술이 등장한다.
술은 가장 빠른 장치다. 한두 잔이 들어가면 마음의 긴장이 풀리고, 생각의 속도가 바뀌며, 불편한 감정이 흐려진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체감이 바뀌는 것이다. 이때 사람은 “살 만하다”는 느낌을 얻는다. 쇼펜하우어의 언어로 말하면, 의지가 만들어낸 불만의 진동이 잠시 낮아지는 셈이다. 반면 예술은 다른 속도로 작동한다. 예술은 감각을 흥분시키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관조’의 상태를 연다. 관조란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해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욕망의 목적성을 내려놓는 태도다. 음악을 듣다 시간이 멈춘 듯 느끼거나, 그림 앞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평온이 찾아오는 순간, 우리는 잠시 의지의 요구에서 물러난다. 술이 신체 상태를 바꾸어 세계를 흐리게 한다면, 예술은 인식의 태도를 바꾸어 세계를 새롭게 고요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술과 예술은 같은 종류의 구원인가. 겉으로는 둘 다 ‘고통의 중지’처럼 보이지만, 쇼펜하우어적 관점에서 둘은 다른 결을 가진다. 술의 도취는 대개 의지를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다른 방식으로 흔든다. 욕망이 조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덜 정교해지고 더 충동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다음 날의 반동이 그 증거다. 반면 예술의 관조는 욕망의 방향을 바꾸거나 욕망을 잠시 중지시키는 쪽에 가깝다. 즉 술이 ‘잊게 하는 장치’라면, 예술은 ‘다르게 보게 하는 장치’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예술은 술의 연장선으로 소비되고, 술은 예술의 이름으로 미화될 위험이 생긴다. 따라서 이 글은 쇼펜하우어의 비관을 단순한 우울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비관이 제시하는 삶의 기술—어떤 도취가 도움이 되고 어떤 도취가 파괴적인가—를 구체적으로 탐색하려 한다.
도취와 관조의 갈림길: 술이 의지를 잠재우는가, 더 자극하는가
쇼펜하우어는 미적 경험을 일종의 ‘구원’으로 보았다. 여기서 구원은 종교적 약속이 아니라, 의지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드문 순간을 뜻한다. 인간은 대개 “내게 무엇이 이익인가”라는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이 관점은 의지의 관점이며, 모든 대상은 욕망의 도구로 읽힌다. 그러나 예술을 대할 때는 이 도구적 독해가 흔들린다.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우리는 당장 그것을 소유할 수 없더라도 만족을 느끼고, 음악을 들을 때는 실용적 목적이 없는데도 마음이 충만해진다. 이때 인식은 의지의 하인이 아니라, 잠시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쇼펜하우어는 바로 이 독자성에 미적 경험의 가치를 두었다. 예술은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지만, 삶을 괴롭히는 의지의 소음을 잠시 끊어준다.
술은 이 구원과 닮아 보이면서도 다른 길로 간다. 술이 주는 편안함은 종종 “생각이 멈췄다”는 느낌과 함께 오지만, 실제로 멈춘 것은 의지 자체라기보다 의지를 감시하고 조율하는 이성의 기능일 때가 많다. 그래서 술은 고통을 낮추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고통의 씨앗을 심기도 한다. 취기 속에서는 과장된 자신감과 즉흥적 욕망이 강화되기 쉽고, 말과 행동의 경계가 느슨해지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가 생길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이는 의지가 잠잠해진 것이 아니라, 의지가 더 거칠게 움직이는 상태다. 욕망의 방향이 세련되게 통제되던 것이 무너지고, 충동이 전면에 나서면서 의지는 오히려 더 큰 소리를 낸다. 다음 날의 후회와 피로는 그 소리의 대가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술은 예술 경험을 어떻게 바꾸는가. 소량의 술은 때때로 ‘관조의 문턱’을 낮출 수 있다. 긴장이 심한 관객은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감상을 방어적으로 만들고, 그 방어는 관조를 방해한다. 이때 가벼운 이완은 감상을 부드럽게 열어, 색과 리듬, 호흡 같은 형식적 요소를 더 편안히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또한 술은 대화의 장을 만들고, 감상 이후의 말들이 서로에게 반향을 일으키며 작품의 층위를 확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긍정은 언제나 조건부다. 술이 관조를 돕는 순간은 술이 ‘배경’으로 머물 때이며, 술이 ‘전경’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관조는 깨진다. 취기가 강해질수록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대상을 내 기분의 연장으로 바꾼다. 작품은 나를 진정시키는 도구가 되거나, 나를 흥분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이때 예술은 의지를 잠시 끊는 장치가 아니라, 의지를 더 세게 누르는 장치로 변질된다.
쇼펜하우어는 윤리에서도 비슷한 구조를 제시한다. 고통을 줄이는 길은 욕망을 끝없이 충족시키는 데 있지 않고, 욕망의 지배를 약화시키는 데 있다. 예술은 그 약화를 잠시 경험하게 하고, 더 깊은 단계에서는 연민과 절제가 삶의 태도로 확장된다. 술이 예술과 만날 때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술이 ‘약화’를 ‘마비’로 바꾸기 쉽다는 점이다. 마비는 잠깐 고통을 덜어주지만, 의지가 낳는 구조적 고통을 다루는 능력 자체를 키우지 못한다. 오히려 반복될수록 더 큰 마비가 필요해지고, 그만큼 반동도 커진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적 관점에서 술은 예술적 구원을 흉내 내는 짧은 지름길일 수 있으나, 그 지름길은 쉽게 막다른 길이 된다. 예술의 관조가 남기는 것은 조용한 정돈과 통찰의 잔상인 반면, 과도한 술이 남기는 것은 기억의 공백과 피로, 때로는 관계의 균열이다. 이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술과 예술을 함께 다루는 첫 번째 윤리다.
마취가 아닌 휴지로서의 도취: 예술이 남기는 ‘지속 가능한 평온’
쇼펜하우어로 술과 예술을 정리할 때, 결론은 단순한 금주나 무조건적 허용이 아니다. 핵심은 지속 가능성이다. 삶의 고통이 구조적이라면, 고통을 잊게 하는 장치는 반드시 반복될 것이고, 반복되는 장치는 결국 삶의 리듬을 바꾼다. 예술은 반복되어도 대체로 삶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을 정련하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게 하며, 욕망의 속도를 늦추는 방향으로 사람을 이끈다. 반면 술은 반복될수록 의존의 위험이 커지고, 의존은 곧 의지의 또 다른 형태—술을 향한 욕망—를 만들어낸다. 쇼펜하우어적 언어로 말하면, 술이 의지로부터 벗어나려다 의지의 다른 사슬을 만드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술을 ‘구원’으로 착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술은 고통을 없애지 못하며, 고통을 다루는 능력을 자동으로 키워주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술은 언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술은 예술의 주인이 아니라, 예술을 둘러싼 사회적 장면의 보조 장치로 머물 때 제한적으로 의미를 얻는다. 예술 감상 전에는 감각의 선명함을 유지하고, 감상 후에 여운을 정리하며 대화를 부드럽게 하는 정도에서 멈추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 멈춤이 가능하려면, 술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 ‘더 잊기 위해’가 아니라 ‘더 잘 말하기 위해’, ‘더 깊이 느끼기 위해’가 아니라 ‘느낀 것을 정돈하기 위해’라는 목적이다. 물론 목적을 세운다고 자동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서 절제가 필요하다. 쇼펜하우어의 세계에서 절제는 도덕적 체면이 아니라, 의지의 폭주를 줄이는 실용적 지혜다. 절제는 고통을 없애지 않지만, 고통을 덜 소모적으로 통과하게 한다.
예술이 제공하는 가장 큰 선물은, 고통이 사라지지 않아도 고통에 눌리지 않을 수 있다는 체험이다. 음악을 듣는 동안, 문학의 문장을 따라가는 동안, 무대 위 인물의 운명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잠시 의지의 ‘해야 한다’에서 벗어나 ‘그저 본다’의 상태에 머문다. 그 상태는 마취가 아니라 휴지이며, 휴지는 다음 걸음을 가능하게 한다. 술이 그 휴지를 흉내 내며 마취로 치닫는 순간, 우리는 다음 걸음을 더 무겁게 만든다. 그러므로 쇼펜하우어적 결론은 분명하다. 예술을 통해 얻는 도취는 가능하면 ‘관조의 도취’로 남겨야 하고, 술을 통해 얻는 도취는 ‘마취의 도취’로 변질되지 않게 관리되어야 한다. 고통을 잊는 기술보다, 고통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기술이 더 값지다. 예술은 그 기술을 제공하고, 술은 그 기술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자리를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