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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부조리 철학으로 해석한 술과 예술의 연대, 그리고 절제의 품격

by 아빠띠띠뽀 2026.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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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에게 세계는 인간의 기대에 친절하게 응답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미를 찾고 질서를 요구하지만, 세계는 종종 침묵으로 답하며 그 침묵이 바로 ‘부조리’의 감각을 낳는다. 이때 술은 부조리를 견디는 방식으로 자주 호출된다. 술은 잠시 현실의 날을 무디게 하고, 고독을 덜어주며, 말과 웃음을 빌려 삶의 무게를 옮겨 놓는다. 그러나 카뮈의 관점에서 술이 ‘망각’으로만 기능한다면 그것은 부조리로부터의 도피이며, 결국 더 큰 공허를 부른다. 반대로 술이 삶의 부조리를 직시한 뒤에도 ‘그럼에도 살아가자’는 태도, 즉 반항과 연대의 감각을 촉발한다면 술은 예술과 닿는 한 가지 통로가 될 수 있다. 이 글은 카뮈의 부조리·반항·연대라는 핵심 개념을 바탕으로 술이 예술 경험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리고 술이 예술가의 삶을 어디에서 무너뜨리는지, 마지막으로 ‘절제’가 왜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미학이 될 수 있는지까지 함께 정리한다.

 

카뮈의 부조리 철학으로 해석한 술과 예술의 연대, 그리고 절제의 품격 이미지

부조리의 밤: 술은 침묵을 달래는가, 침묵을 더 선명하게 하는가

카뮈의 철학에서 출발점은 거창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일상의 감각이다. 어떤 순간, 익숙하던 풍경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매일 반복되던 일이 이유 없이 공허하게 느껴지며, 삶의 목적이 허공에 떠버리는 듯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는 이를 ‘부조리’라고 불렀다. 부조리는 세계가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인데 세계는 그 갈망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데서 생긴다. 인간의 질문이 있고, 세계의 침묵이 있다. 그 사이의 간극이 부조리다. 이 간극은 단순히 우울한 기분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찌르는 감각이므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날은 더 날카롭게, 어떤 날은 더 조용히 우리를 따라온다.

술은 대개 이 부조리의 밤에 함께 등장한다. 술잔이 오가는 자리에서는 침묵이 덜 무겁게 느껴지고, 말이 풀리며, 때로는 웃음이 삶을 잠깐 들어 올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술을 “견딤의 기술”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카뮈는 견딤을 망각과 혼동하지 않는다. 부조리를 직시하는 태도는, 부조리를 없애려는 노력과 다르다. 부조리는 제거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동행하는 조건에 가깝다. 따라서 술이 부조리를 ‘지워버리려는’ 방향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잠시 부드러운 마취를 주더라도 결국 삶의 균열을 더 크게 만든다. 다음 날 남는 것은 침묵의 소멸이 아니라, 침묵의 더 큰 반등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카뮈의 철학은 금욕의 설교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부조리를 느끼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되, 그 사실 위에서 “그럼에도 살아가자”는 결단을 강조한다. 그 결단이 바로 반항이고, 반항이 곧 연대로 이어진다. 술이 이 지점에서 예술과 만날 수 있다. 예술은 부조리를 해결하지 못한다. 대신 부조리를 견딜 수 있는 형태를 제공한다. 말로 정리되지 않는 감각을 문장과 리듬으로 만들고, 파편 같은 시간을 장면으로 엮어, 침묵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태도’를 빚어낸다. 술이 단지 잊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서로의 부조리를 잠시 공유하고 연대의 숨을 붙이는 장치가 될 때, 술은 예술의 주변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얻는다. 다만 그 역할은 언제나 조건부이며, 책임을 동반한다.

 

반항과 연대의 미학: 술자리, 예술, 그리고 “그럼에도”의 문장

카뮈가 말한 반항은 파괴적 격정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부조리를 인정하되, 그 사실을 핑계로 삶을 놓아버리지 않는 자세. 여기에는 특유의 절도가 있다. 반항은 “나는 의미를 얻지 못했으니 아무렇게나 살겠다”가 아니라, “의미가 보장되지 않더라도 나는 나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라는 선언에 가깝다. 예술은 이런 반항을 가장 섬세하게 보여주는 장르다. 작품은 세계의 침묵을 깨뜨리지 못하지만, 침묵을 ‘형태’로 바꾸어 인간이 삼킬 수 있게 만든다. 카뮈가 소설과 에세이, 희곡을 통해 구축한 문장들의 힘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답을 주지 않으면서도, 답이 없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는 온도를 만든다.

술자리 역시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잘 조직된 술자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다만 문제를 함께 두고 앉을 수 있게 한다. 누군가의 실패가 이야기로 풀리고, 누군가의 고독이 농담으로 우회하며, 말과 침묵이 번갈아 오가면서 “나만 이런 것이 아니구나”라는 감각이 생긴다. 카뮈가 강조한 연대는 거대한 이념의 결집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건네는 최소한의 인정에서 시작한다. 술이 이 인정의 순간을 촉발한다면, 술은 부조리의 밤을 통과하는 일종의 ‘사회적 호흡’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술이 연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연대가 술을 통해 잠시 형태를 얻는다는 점이다. 연대의 핵심은 취기가 아니라 태도다. 취기가 사라진 뒤에도 상대의 고통을 함부로 이용하지 않고, 어제의 대화를 책임 있게 이어가는가. 그 지속성에서 연대는 진짜가 된다.

예술 창작의 장면에서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된다. 술이 창작자에게 순간적인 과감함을 줄 수는 있다. 자기 검열이 느슨해지고, 문장이 더 빠르게 튀어나오며, 감정의 색이 선명해지는 듯한 순간이 있다. 하지만 카뮈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선명함’이 아니라 ‘정직함’이다. 부조리는 감정의 폭발로 극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조리를 다루는 예술은 과장보다 절제를 요구한다. 절제는 빈약함이 아니라 정확함이다. 감정이 과잉이면 세계가 흐려지고, 세계가 흐려지면 부조리는 오히려 숨는다. 카뮈의 문장이 강한 이유는 세계를 미화하지도, 절망으로 과장하지도 않는 균형감 때문이다. 술이 그 균형을 무너뜨리면, 작품은 부조리를 직시하기보다 부조리를 덮는 장식으로 변한다.

또 하나의 위험은 술이 ‘반항’을 ‘파괴’로 오해하게 만들 때다. 반항은 자기 삶을 붙드는 힘인데, 술이 반복되면 삶은 붙들리기보다 흩어진다. 다음 날의 무기력, 미뤄진 작업, 지연되는 책임이 쌓이면, 창작자는 부조리에 맞서는 대신 부조리에 굴복하는 생활을 선택하게 된다. 카뮈는 자살을 철학의 근본 문제로 제기했지만, 그의 결론은 삶을 놓아버리라는 권고가 아니었다. 그는 삶을 지속하는 쪽, 즉 반항을 택한다. 술이 창작자에게 반항의 에너지를 줄 수 있으려면, 그것은 단발적 흥분이 아니라, 다음 날을 살아낼 수 있는 리듬을 해치지 않는 범위여야 한다. 쉽게 말해 술은 “그럼에도”의 문장을 쓰게 해 줄 수는 있어도, 그 문장을 끝까지 다듬어 세상에 내놓는 손을 대신해주지 못한다.

 

절제는 도덕이 아니라 미학이다: 부조리 속에서 술을 두는 자리

카뮈의 부조리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실질적인 교훈은, 삶이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더 정직하게 선택해야 한다. 술 또한 그 선택의 영역 안에 놓인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단지 취향이 아니라, 부조리 앞에서 내가 취하는 태도의 일부가 된다. 술이 나를 잠시 부드럽게 할 수는 있지만, 그 부드러움이 삶을 이어가는 힘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더 큰 침묵을 불러온다. 반대로 술이 나를 더 정직하게 만들고, 타인의 고통을 더 섬세하게 보게 하며, 내가 회피하던 책임을 다시 붙잡게 한다면, 술은 부조리 속에서도 하나의 인간적 장면을 만드는 매개가 될 수 있다. 다만 그 경우에도 술은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 언제나 ‘태도’다.

여기서 절제의 의미가 새롭게 드러난다. 절제는 흔히 금지와 억압으로 오해되지만, 카뮈의 결에 가까운 절제는 오히려 삶의 정확도를 높이는 기술이다. 과잉은 세계를 흐리고, 흐려진 세계에서는 부조리가 보이지 않는다. 부조리가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반항할 이유도 잃는다. 그래서 절제는 부조리를 직시하기 위한 조건이며, 예술이 자기 진실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술의 절제는 단지 건강 관리가 아니라, 삶과 예술을 동시에 붙드는 미학적 선택이 될 수 있다. 어느 선에서 멈출지 아는 감각, 취기의 유혹을 알면서도 다음 날의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경계를 지키는 품격. 이것들은 도덕 교과서의 문장이 아니라, 부조리 속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한 구체적 기술이다.

카뮈의 세계에서 희망은 결코 달콤한 약속이 아니다. 오히려 희망은 “답이 없음을 알면서도 계속한다”는 단단한 반복에 가깝다. 시지프가 바위를 밀어 올리는 장면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술이 부조리를 잊게 해주는 순간이 있다 해도, 바위는 다시 눈앞에 놓인다. 그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망각이 아니라, 다시 밀어 올릴 힘이다. 예술은 그 힘을 형태로 만들고, 사람들 사이의 연대는 그 힘을 나누게 한다. 술은 그 둘의 주변에서, 때로는 숨을 고르게 해 주고 때로는 발을 헛디디게 만든다. 그러므로 술을 부조리 철학의 관점에서 재배치한다면, 결론은 선명해진다. 술은 부조리를 ‘해결’ 하지 못한다. 다만 술이 연대의 장면을 열어줄 때, 그리고 그 장면이 다음 날의 책임으로 이어질 때, 술은 예술과 함께 “그럼에도”의 삶을 지탱하는 작은 도구가 될 수 있다. 그 한계를 아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술은 위험한 도피가 아니라 절제된 미학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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