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예술가의 영감을 깨우는 불꽃으로도, 이성을 흐리는 안개로도 말해진다. 그러나 플라톤의 철학에서 술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질서와 도시의 질서를 동시에 시험하는 매개이다. 그는 시인과 예술가를 무턱대고 찬양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술이 진리를 비추기보다 모방을 반복하며 감정을 자극해 이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취기는 이러한 우려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된다. 동시에 플라톤은 ‘광기’가 언제나 타락만을 뜻한다고 보지도 않았다. 사랑과 시, 예언과 종교적 도취 같은 특정한 광기는 인간을 일상적 계산 너머로 끌어올려 더 큰 것을 향하게 할 수 있다고도 보았다. 중요한 것은 술이 불러오는 상태가 영혼의 조화를 돕는지, 아니면 영혼을 분열시키는지의 문제이며, 그것은 개인의 윤리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의 법과 교육, 문화의 품격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글은 플라톤의 ‘모방(mimesis) 비판’, ‘신적 광기(μανία)의 양면성’, ‘절제(sophrosyne)와 법의 역할’을 중심으로, 예술가의 술이 어떤 의미에서 위험하며 또 어떤 의미에서 교육적 장치가 될 수 있는지 철학적으로 정리한다.

술잔 앞에서 드러나는 영혼의 구조: 플라톤의 문제의식
플라톤의 철학을 술과 예술의 관계로 읽는다는 것은, “술을 마시면 창작이 잘 되는가” 같은 경험적 질문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에게 핵심은 영혼의 질서였다. 플라톤은 인간을 단순히 생각하는 머리로 보지 않고, 욕망과 기개(분노·명예욕), 이성이라는 서로 다른 힘들이 한 사람 안에서 다투는 존재로 이해했다. 이 힘들이 조화롭게 배치될 때 인간은 자신을 다스릴 수 있고, 그 다스림이 개인의 덕을 넘어 도시의 정의로 확장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술은 단지 개인의 기분을 바꾸는 물질이 아니라, 영혼 내부의 힘의 균형을 흔들어 “누가 주인이 되는가”를 드러내는 시험대가 된다. 취기가 강해질수록 욕망이 말의 주도권을 쥐고, 기개가 과장된 자신감으로 부풀고, 이성은 뒤로 밀려나기 쉽다. 플라톤이 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이러한 구조적 경계가 깔려 있다.
예술이 이 문제와 맞닿는 이유는, 플라톤이 예술을 ‘영혼을 다루는 기술’로 보았기 때문이다. 음악과 시, 연극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감정의 리듬을 조율하고 습관을 만들며,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무엇을 부끄럽다고 느끼는지의 감각을 길들이는 힘을 가진다. 그런데 술이 감정의 문턱을 낮추고, 예술이 감정을 흔드는 장치라면, 둘이 결합하는 순간 영혼은 더욱 쉽게 기울어진다. 술자리에서 노래와 이야기, 과장과 웃음이 뒤섞일 때,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어떤 태도를 정상으로 여길 수 있다. 플라톤은 바로 그 지점을 두려워했다. 예술은 영혼을 고양시킬 수도 있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술은 그 가능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촉매로 작동한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술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예술을 모두 추방하자고만 말한 것은 아니다. 그의 사유는 늘 “어떤 조건에서”라는 질문을 붙든다. 술이 방종을 부추길 때는 위험하지만, 적절히 조율된 환경에서는 오히려 교육적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보는 대목도 있다. 마찬가지로 예술도 무조건 배척이 아니라, 진리를 향하도록 길들여져야 한다는 요청으로 이어진다. 결국 플라톤에게 술과 예술은 동일한 질문 앞에 선다. ‘쾌락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감정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자유를 어떻게 공동체의 품격으로 연결할 것인가’. 이 글은 그 질문을 따라가며, 예술가의 술이 갖는 철학적 함의를 촘촘히 풀어보고자 한다.
모방과 도취의 결합: 플라톤은 왜 예술가의 술을 경계했는가
플라톤이 예술을 문제 삼을 때 자주 등장하는 축은 ‘모방’이다. 그는 예술이 세계의 진리를 직접 보여주기보다, 이미 한 번 만들어진 것의 겉모습을 다시 재현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이때 예술은 이성의 판단을 돕기보다 감각과 감정을 자극해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 특히 시와 연극은 사건을 “그럴듯하게” 만들고, 관객을 특정 감정 상태로 몰아넣는다. 관객은 슬픔에 젖고 분노에 들끓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을 믿게 되었는지조차 모른 채 태도를 획득한다. 술이 개입하면 이 메커니즘은 더 빠르고 강해진다. 취기 속에서는 논리적 검증보다 분위기와 말의 기세가 우위를 점하고, “느낌이 맞다”는 확신이 “그게 진실이다”라는 착각으로 변하기 쉽다. 플라톤이 경계한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진리 대신 그럴듯함이, 앎 대신 도취가, 성찰 대신 감정의 전염이 공동체의 기준이 되는 순간 말이다.
이 관점에서 예술가의 술은 두 겹으로 위험해진다. 첫째, 예술가 자신이 취기 속에서 자기에 대한 판단을 잃을 수 있다. “지금 떠오르는 생각이 위대하다”는 확신은 취기 때문에 과장될 수 있고, 다음 날 남는 것은 과잉의 문장과 흐릿한 구조일 수 있다. 둘째, 예술가가 술을 매개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칠 때, 그 영향은 더 직접적으로 영혼을 흔든다. 예술은 본래 사람의 내면에 닿는 힘을 갖는데, 술은 그 내면의 방어벽을 낮추어 버린다. 술자리에서 불리는 노래, 즉흥적인 이야기, 감정이 폭발한 연설은 때로 예술적 순간처럼 빛나지만, 동시에 검증되지 않은 가치와 폭력적 감정을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 플라톤이 두려워한 것은 예술의 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힘이 이성의 통제 없이 작동할 때의 사회적 결과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광기’ 자체를 배척했는가. 흥미롭게도 그는 특정한 종류의 광기를 긍정하는 전통을 함께 품고 있다. 사랑에 사로잡힌 영혼이 더 높은 아름다움을 향해 올라가려는 열망, 시적 영감이 인간을 일상적 계산 너머로 끌어올리는 순간, 종교적 도취가 삶을 넘어선 차원을 암시하는 장면 등은 플라톤 텍스트에서 단순히 조롱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그 광기가 방향을 잃을 때, 즉 개인의 쾌락과 허영을 위해 소비될 때, 그것이 영혼을 찢어놓는다고 본다. 술이 불러오는 도취는 이 ‘방향의 문제’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술이 사랑과 우정의 대화를 깊게 만들 수는 있지만, 동시에 욕망의 폭주로 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다. 술이 창작의 문턱을 낮출 수는 있지만, 동시에 자기기만을 강화해 “술 없이는 못 쓴다”는 의존을 만들 수도 있다. 플라톤적 기준에서 좋은 도취는 영혼의 상승을 돕고, 나쁜 도취는 영혼의 하강을 가속한다.
여기서 절제(sophrosyne)의 의미가 다시 등장한다. 절제는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영혼의 각 부분이 제자리를 지키도록 만드는 정치적·교육적 기술이다.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것이 절제의 전부가 아니라, 술이 불러오는 힘을 알고 그 힘이 이성을 전복하지 못하도록 장치를 두는 것이 절제다. 플라톤이 법과 교육, 공동체의 규범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인의 내적 의지에만 맡기기에는 술과 예술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적 힘이 너무 크다. 그래서 그는 술자리가 허용되더라도 그 안에 규칙과 감독, 대화의 품격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예술이 허용되더라도 그 예술이 어떤 영혼을 길러내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보았다. 요컨대 플라톤이 경계한 것은 술 그 자체가 아니라, 술이 예술과 결합했을 때 ‘모방의 설득력’이 ‘도취의 확신’으로 변해 진리의 자리를 대체하는 사태였다.
예술가의 술은 ‘자유’가 아니라 ‘질서’를 묻는다: 플라톤적 정리
플라톤의 눈으로 술과 예술을 함께 바라보면, 논점은 의외로 단순해진다. 그는 술을 악마화하지도, 예술을 무조건 배척하지도 않는다. 그가 집요하게 묻는 것은 “무엇이 영혼을 좋은 방향으로 형성하는가”이다. 예술가의 술이 낭만적 신화로 소비되는 문화는 종종 자유를 찬미하지만, 플라톤적 관점에서 자유는 방임이 아니다. 자유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며, 그 능력은 우연히 주어지지 않는다. 술이 순간의 용기를 줄 수는 있으나, 그 용기가 곧 진실을 보증하지 않는다. 오히려 취기 속에서 강해지는 확신은 진실이 아니라 분위기의 산물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에게 술은 “내가 얼마나 대담해졌는가”를 증명하는 물건이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나를 통제할 수 있는가”를 드러내는 거울에 가깝다.
또한 플라톤은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이 공동체의 정서적 기초를 만든다고 본다. 사람들이 무엇을 아름답게 여기고 무엇을 경멸하는지, 어떤 감정에 쉽게 휩쓸리고 어떤 감정에는 면역이 생기는지, 이 모든 것은 예술과 생활습관의 결합 속에서 형성된다. 술이 이 결합을 가속한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술은 개인 취미로만 남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와 노래, 과장과 풍자가 반복되면, 그것은 한 공동체의 정서적 규범이 된다. 따라서 플라톤적 결론은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문화정치학에 가깝다. 어떤 술자리가 어떤 인간을 만들고, 어떤 예술이 어떤 시민을 길러내는가. 이 질문을 회피한 채 ‘예술은 원래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자유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방치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우리는 플라톤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첫째, 술과 예술을 연결할 때 ‘영감’보다 ‘검증’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취기 속의 확신은 매혹적이지만, 작품의 완성은 결국 맑은 시간의 선택과 수정, 절제의 노동에서 온다. 둘째, 술자리의 분위기와 예술적 표현이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도록 규칙과 합의를 세워야 한다. 플라톤이 말한 절제는 바로 이런 합의의 기술이다. 셋째, 술이 예술을 더 진실하게 만드는지, 아니면 더 그럴듯하게만 만드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플라톤이 두려워한 것은 예술의 힘이 아니라, 그 힘이 진리 대신 ‘그럴듯함’을 왕좌에 앉히는 순간이다. 이 점검이 있을 때, 술은 예술을 좀먹는 도피가 아니라, 대화를 더 깊게 만들고 관계의 품격을 높이는 제한된 계기가 될 수 있다.
결국 플라톤이 예술가의 술을 어떻게 봤는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술은 예술의 날개가 될 수도 있지만, 그 날개가 어디로 날아가는지를 묻지 않는 순간 추락이 시작된다. 플라톤은 술잔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쉽게 감정에 설득되고, 얼마나 쉽게 그럴듯함을 진실로 착각하는지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예술가의 술을 낭만의 상징으로 두지 않고, 영혼의 질서와 도시의 질서를 가늠하는 척도로 세웠다. 이 관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술과 예술의 관계는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질서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