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한다는 말은 흔히 이성이 흐려지고 판단이 무뎌지는 상태를 뜻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세계가 다르게 열리는 방식”을 가리키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기분(Stimmung)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 안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분위기적 개방’이다. 우리는 어떤 기분 속에서 사물과 타인을 만나며, 그 기분은 무엇이 중요하게 보이고 무엇이 멀어지는지, 말이 어떻게 흘러가고 침묵이 어떤 무게를 갖는지까지 미리 조율한다. 취기 역시 그러한 조율의 한 양식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거리감과 시간감각,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를 변형시킨다. 이 글은 하이데거의 기분 개념을 토대로 취기가 예술 감상과 창작, 그리고 공동체적 장면에서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열고 닫는지 분석하며, 취기가 단지 ‘도피’로만 환원되지 않도록 윤리적 경계와 책임의 문제까지 함께 점검한다.

기분은 감정이 아니라 세계가 열리는 방식이다
하이데거에게 인간(현존재)은 세계 밖에서 세계를 관찰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늘 어떤 상황 속에 이미 놓여 있으며, 그 상황은 사물의 의미를 미리 배치한다. 이 “미리 배치함”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장치가 기분(Stimmung)이다. 기분은 흔히 심리학에서 말하는 개인의 내적 상태로 오해되지만,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것은 기분이 세계-내-존재의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불안, 권태, 기쁨 같은 기분은 단지 마음속 색깔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특정한 톤으로 조율되는 사건이다. 어떤 날은 사소한 소리가 유난히 거슬리고, 어떤 날은 같은 거리도 이상하게 멀게 느껴지며, 어떤 순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이런 차이는 ‘나의 기분’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현전 하는 양식’의 변화에 가깝다. 즉 기분은 의미의 가능조건이며, 내가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보지 못하는지의 지평을 마련한다.
이 관점에서 술의 취기는 단순한 생리적 반응을 넘어, 세계가 열리는 방식의 변형으로 읽힐 수 있다. 취기는 사물과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바꾸고, 말의 속도와 억제의 정도를 바꾸며, 시간의 흐름을 길게 늘이거나 짧게 압축한다. 평소에는 지나치게 분명하던 규칙이 흐려지고, 반대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결이 드러나기도 한다. 술자리에서 “오늘따라 음악이 더 선명하다”거나 “이야기가 이상하게 깊어진다”는 경험은 단지 기분 좋은 착각이 아니라, 세계가 다른 분위기 속에서 다시 조직되는 현상일 수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기분의 역할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적 개방을 설명하는 데 유효하다. 취기를 통해 세계가 달리 열린다면, 예술 경험도 달리 열린다. 우리는 작품을 ‘정보’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분위기 속에서 ‘만난다’. 이 만남의 톤이 달라지면, 같은 작품도 전혀 다른 얼굴을 보인다.
다만 철학적 해석이 곧 미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취기는 세계의 열림을 확장할 수 있지만, 동시에 열림을 좁히는 방식으로도 작동한다. 술이 불안을 잠재우는 대신 감각을 둔화시키고, 타인의 경계를 무시하게 만들며, 다음 날의 공허를 반복한다면, 그 취기는 세계를 풍부하게 여는 기분이 아니라 세계를 얇게 만드는 마취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취기와 예술을 하이데거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술이 영감을 준다”는 낭만적 통념을 되풀이하는 일이 아니라, 취기가 어떤 종류의 세계-열림을 낳는지, 그리고 그 열림이 책임 가능한 방식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 따져보는 작업이다.
취기는 거리·시간·언어를 다시 조율한다: 예술 경험의 변형
취기가 예술 경험에 미치는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거리감’의 재조정이다. 하이데거의 세계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의미의 관계망이며, 우리는 그 관계망 속에서 가까움과 멀음, 중요함과 하찮음을 끊임없이 가늠한다. 술이 들어가면 이 가늠이 흔들린다. 평소에는 지나치게 멀게 느껴지던 사람에게 말이 쉽게 걸리고, 사소해 보이던 장면이 갑자기 두드러지며, 특정한 소리나 색이 과장되게 다가온다. 예술 감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공연장에서의 호흡, 화폭의 질감, 소설 문장의 리듬이 평소보다 더 ‘가까이’ 들이닥치고, 관객은 관찰자라기보다 참여자처럼 느끼기도 한다. 이는 취기가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다는 단순한 주장과 다르다. 핵심은 감각의 강도만이 아니라, 세계의 배치가 바뀐다는 점이다. 무엇이 중심이 되고 무엇이 주변으로 밀려나는지의 질서가 재편될 때, 작품은 새로운 의미의 경로를 제공한다.
두 번째 변화는 ‘시간감각’이다. 하이데거에게 시간은 시계의 흐름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며 과거를 끌어안는 방식이다. 기분은 이 시간성을 깊게 흔든다. 권태가 시간을 질질 끌게 만들고, 불안이 시간을 조여 오게 만들듯, 취기는 시간을 압축하거나 확장한다. 술자리에서 몇 시간이 한순간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한 곡의 음악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술에서 이 변화는 특히 결정적이다. 예술 작품은 ‘시간을 조직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시간 자체를 재료로 삼고, 영화는 편집으로 시간을 재구성하며, 문학은 문장 리듬으로 독자의 시간을 조율한다. 취기 속에서 이러한 조율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반복되는 후렴이 더 강한 회귀감으로 들리고, 장면 전환이 더 급격하게 체감되며, 서사의 빈틈이 오히려 풍부한 여백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취기가 지나치면 시간 조직을 따라갈 능력이 무너져 작품은 단지 ‘자극’으로만 소비된다. 즉 취기는 예술의 시간성을 깊게 만지게 하기도, 시간성을 파괴해 의미를 끊어버리기도 한다.
세 번째 변화는 ‘언어와 침묵의 윤곽’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보며, 말해짐은 세계가 드러나는 방식과 직결된다. 취기는 말의 문턱을 낮추어 숨겨진 감정을 꺼내기도 한다. 이때 발생하는 고백, 농담, 과장은 하나의 즉흥적 서사로서 예술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실제로 술자리의 이야기 방식은 비약과 반복, 과장과 생략을 동반하며, 이는 문학적 수사와 닮아 있다. 그러나 언어가 풀릴수록 책임도 커진다. 말은 세계를 열지만, 동시에 타인의 세계를 훼손할 수도 있다. 취중 발화가 “진짜 속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때, 그 말은 상대의 경계를 침범하고 관계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하이데거적으로 표현하면, 이는 세계-함께-존재의 구조를 파괴하는 방식의 열림이다. 따라서 취기와 예술의 관계를 논할 때, 언어의 해방만을 찬양할 수는 없다. 어떤 말은 예술적이고 어떤 말은 폭력적이다. 둘의 차이는 말의 화려함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 가능성을 존중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결국 취기는 기분의 한 양식으로서 세계를 다르게 열어 보이지만, 그 열림이 “더 깊은 만남”으로 이어질지 “더 얕은 소모”로 끝날지는 조건에 달려 있다. 취기가 예술을 풍부하게 만들려면, 첫째 취기가 감상과 창작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취기 속의 감각을 다음 날의 맑은 시간에 다시 붙잡아 정련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타인의 경계와 동의가 철저히 존중되어야 한다. 하이데거의 기분론은 우리에게 술을 미화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술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적 개방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개방을 책임 있게 다루라고 요구한다.
취기의 존재론적 교훈: 세계를 여는 힘과 세계를 닫는 위험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취기는 단순한 기호품 경험이 아니라, “내가 세계에 어떻게 던져져 있는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대개 이성적 판단으로 세계를 통제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기분이 먼저 세계의 톤을 조율한다. 취기는 이 사실을 과감하게 폭로한다. 술이 들어간 순간, 내가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흔들리고, 사소하다고 넘겼던 것들이 갑자기 중심에 서며, 나와 타인의 거리감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바뀐다. 이 변화는 때로 예술적 통찰에 닿는다. 즉, 세계가 달리 열리는 순간에만 보이는 결이 있고, 그 결을 붙잡아 형식으로 만드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취기는 그 결을 보여줄 수 있지만, 결을 작품으로 남기는 일은 결국 맑은 시간의 노동과 절제, 그리고 자기 성찰에 달려 있다.
동시에 취기는 세계를 ‘닫는’ 방식으로도 작동한다. 취기가 반복될수록 세계는 점차 단순화되고, 관계는 상투적인 열기와 피로의 교대 속에서 닳아간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책임의 상실이다. 취기 속에서 타인의 경계를 넘는 말과 행동이 발생하고, 그 결과가 “술 때문”이라는 말로 지워질 때, 세계-함께-존재는 근본에서 흔들린다. 예술 경험 또한 마찬가지다. 취기가 작품을 깊게 만나게 하는 대신, 자극을 빠르게 소비하게 만들고 기억을 조각내면, 예술은 삶을 두텁게 하는 힘을 잃는다. 하이데거적으로 말해 예술은 존재의 드러남을 가능하게 하는데, 취기가 그 드러남을 ‘단절된 자극’으로 환원한다면, 우리는 존재를 만난 것이 아니라 잠시 소음을 산 셈이 된다.
따라서 취기와 예술의 관계를 성숙하게 정리하려면, 술을 “영감의 근원”으로 숭배하기보다 “기분의 변형 장치”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술이 열어주는 분위기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이 사유와 창작, 감상의 깊이로 이어지려면, 취기 이후에 그 분위기를 언어와 형식으로 다시 책임 있게 정돈해야 한다. 또한 함께 있는 사람들의 동의와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어떤 분위기적 개방도 미학적 가치로 정당화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하이데거의 기분론은 술을 찬양하거나 금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의 취기는 세계를 더 넓게 열고 있는가, 아니면 더 가난하게 닫고 있는가.” 이 질문을 붙드는 한, 술은 예술의 주변에서 위험한 유혹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읽게 하는 철학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