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이 미리 정해진 본질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 간다고 말한다. 이때 술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선택의 무게를 잠시 덜어주는 장치로 등장한다. 술을 마시면 불안이 누그러지고 말이 쉬워지며, 책임을 미루는 변명도 손쉽게 마련된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시선에서 그러한 ‘가벼움’은 곧 자유를 회피하는 방식, 즉 자기기만(앙가주망의 회피)과 ‘나쁜 믿음(mauvaise foi)’의 형태가 될 수 있다. 반면 술이 언제나 도피라는 결론도 성급하다. 술자리가 타인과의 관계를 새로 직면하게 만들고, 예술가에게는 자신이 숨기던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글은 사르트르의 핵심 개념인 자유, 책임, 타인의 시선, 나쁜 믿음을 바탕으로 술과 예술의 관계를 분석하며, 술이 창작을 촉진하는 순간과 창작을 망치는 순간을 ‘실존의 윤리’라는 기준으로 구분해 본다.

자유는 축복이면서 형벌이다: 술이 끼어드는 지점
사르트르가 말하는 인간은 ‘자유롭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권리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결국 선택을 피할 수 없다는 구조적 운명에 가깝다. 선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우리는 이미 선택하고 있으며,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자유는 찬란한 가능성이면서 동시에 견디기 어려운 부담이 된다. 인간은 자기 삶을 스스로 규정해야 하고, 그 규정은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이때 불안은 실존의 기본 정조로 떠오른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인간은 쉽게 흔들린다. 술은 바로 그 흔들림의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매우 현실적인 도구다. 술은 불안을 부드럽게 감싸고, 결정을 유예하게 만들며, 자기 자신을 잠시 잊게 한다. 문제는 그 ‘잠시’가 반복될 때, 술은 불안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불안을 회피하는 습관이 된다는 점이다.
예술과 술이 자주 엮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노출의 행위다. 창작자는 자기 내부의 불확실한 것을 끌어내어 형태로 만들고, 그 형태를 타인의 시선 앞에 놓는다. 그 순간 창작자는 “이것이 나다”라고 말하는 셈이 된다. 사르트르가 강조한 타인의 시선, 즉 ‘타자-존재’의 문제는 여기서 즉각적으로 발생한다. 작품은 곧 평가와 비교, 오해와 왜곡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창작자는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동시에 타자의 시선 속에서 대상화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술은 이 위험을 무디게 하거나, 반대로 위험을 과감히 감당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 취기 속에서는 부끄러움이 줄고, 말이 쉬워지며, 표현이 대담해진다. 그러나 그 대담함이 ‘자유의 용기’인지 ‘책임의 망각’인지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르트르가 말한 ‘나쁜 믿음’은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치 자유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기기만이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 “술 마셔서 그랬어” 같은 말은 자유의 부담을 외부로 떠넘기는 대표적 문장이다. 술은 이 문장을 쉽게 만들어준다. 물론 모든 취중 발언과 행동을 나쁜 믿음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다만 술이 자주 쓰이는 방식이 ‘책임으로부터의 탈출구’라면, 사르트르적 관점에서 그것은 실존을 얇게 만들고, 예술 역시 얇아지게 만든다. 이 글은 술과 예술의 관계를 “영감”이나 “낭만”이 아니라, 자유와 책임이라는 실존의 핵심 기준으로 점검해보려 한다.
나쁜 믿음과 자기기만: 술이 예술을 돕는 척하며 갉아먹는 방식
술이 예술과 만나는 장면은 대개 매혹적이다. 막힌 문장이 풀리고, 말이 빨라지고, 감정이 선명해지는 듯하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언어로 이 장면을 분석하면, 우리는 곧 질문을 만나게 된다. “지금 나는 자유를 행사하고 있는가, 자유를 회피하고 있는가.” 창작이 어렵다는 것은 기술이 부족해서만이 아니다. 창작은 선택의 연속이며, 선택은 필연적으로 배제를 동반한다. 어떤 문장을 택하면 다른 문장을 버려야 하고, 어떤 소재를 밀어붙이면 다른 가능성을 포기해야 한다. 이 배제의 책임이 창작자를 괴롭힌다. 술은 그 괴로움을 완화한다. 하지만 그 완화가 곧장 창작의 진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술이 제공하는 것은 ‘결정의 유예’ 일 때가 많다. 취기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지만, 다음 날 남는 것은 정돈되지 않은 파편과 과장된 확신의 잔해일 수 있다. 이때 술은 창작을 돕는 동력이 아니라, 선택을 미루는 장치로 기능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나쁜 믿음의 특징은, 인간이 스스로를 ‘사물’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나는 예술 가니까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셔”라는 말은 자신을 하나의 고정된 본질로 환원한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따르면 그런 본질은 없다. 예술가라는 정체성도 선택과 실천의 결과로 형성될 뿐이며, 그 정체성은 매 순간 갱신되거나 붕괴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안이 두려워 본질의 가면을 쓴다. 술은 그 가면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역설을 낳는다. “취하면 더 솔직해져”라는 문장이 대표적이다. 솔직함이란 책임을 포함할 때에만 가치가 있다. 책임을 제외한 솔직함은 종종 무례와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된다. 사르트르적 기준에서 중요한 것은 ‘진짜 감정’인지 여부가 아니라, 그 감정을 선택으로 끌어안고 결과를 감당할 의지가 있는지다. 술은 감정의 표면화는 돕지만, 감당의 의지를 약하게 만들 수 있다.
또 하나의 핵심은 타인의 시선이다. 예술은 타인에게 닿을 때 비로소 사회적 사건이 된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은 창작자를 대상화한다. “저 사람은 이런 스타일”, “저 작품은 이런 의미”라는 규정이 달라붙고, 창작자는 그 규정의 틀 속에서 해석된다. 사르트르는 이 대상화를 인간관계의 근본 긴장으로 보았다. 술자리는 이 긴장을 잠시 해소하는 듯 보인다. 서로가 웃고 떠들면, 타인의 시선은 날카로운 평가가 아니라 친밀한 공기로 변한다. 그러나 그 친밀함은 때로 허상이다. 취기가 사라지면 다시 평가와 거리감이 돌아온다. 만약 창작자가 술에 기대어 관계를 유지하고, 술이 있어야만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면, 그는 타인의 시선 앞에서 스스로를 통째로 내맡기는 셈이 된다. 이는 자유의 확장이라기보다 자유의 축소에 가깝다.
그렇다고 술이 늘 나쁜 믿음이라는 뜻은 아니다. 술이 오히려 자기기만을 깨뜨리는 경우도 있다. 취기 속에서는 평소에 숨기던 자기 검열이 약해지고, “나는 사실 이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같은 진술이 튀어나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진술이 다음 날의 선택으로 이어지느냐이다. 사르트르의 윤리는 행동으로 증명된다. 취중의 고백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다시 동일한 회피의 습관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실존적 이벤트가 아니라 감정의 방출에 불과하다. 반대로 취중에 드러난 진실을 맑은 시간에 재검토하고, 작품과 삶의 방식으로 옮겨간다면, 술은 도피가 아니라 계기가 될 수 있다. 결국 관건은 술이 ‘행동을 대신’하는가, ‘행동을 촉발’하는가에 있다.
실존의 윤리로 술을 재배치하기: 도피가 아닌 선택으로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술과 예술의 관계는 감성적 낭만으로 포장될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유를 어떻게 다루는 가에 대한 문제이며, 책임을 어떤 방식으로 회피하거나 감당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술이 위험한 이유는 단지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의 부담’을 다루는 방식을 은근히 바꿔놓기 때문이다. 술은 선택의 날을 무디게 하고, 결과를 흐리게 하며, 다음 날의 나에게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는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이런 변명은 곧 나쁜 믿음의 핵심이다. 인간은 늘 자기 행위의 주체이며, 술은 그 사실을 지워주지 않는다. 따라서 “술 때문에”라는 말은 설명이 아니라 회피가 될 때가 많다.
그렇다면 예술가 혹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술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사르트르 적으로 말하면, 술을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자리로 되돌려야 한다. 마시는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고, 마시지 않는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의 이유를 스스로 승인해야 한다. 술이 창작의 문을 여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그 문을 통과해 작업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맑은 시간의 책임이다. 취기 속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는 재료일 뿐이며, 재료를 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은 선택의 연속이다. 술이 선택을 미루게 한다면, 그 술은 예술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다. 반대로 술이 일시적으로 긴장을 풀어주되, 다음 날의 행동과 작업으로 이어지게 한다면, 술은 ‘도피’가 아니라 ‘촉발’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또한 타인의 시선과 관련해 중요한 윤리적 기준이 있다. 술자리의 친밀함이 타인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흐른다면, 그것은 실존의 만남이 아니라 실존의 침해다. 사르트르에게 타인은 나를 대상화하는 동시에, 나 역시 타인을 대상화할 유혹을 가진다. 술은 이 유혹을 증폭시킨다. 따라서 술의 자리에서 가장 근본적인 규칙은 간단하다. 타인의 동의와 안전이 우선이며, 관계의 존엄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만 분위기와 솔직함이 의미를 갖는다. 예술이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든다면, 술의 자리 또한 인간을 더 깊이 존중하는 방향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사르트르 실존주의로 보면, 술은 예술의 동반자이기 전에 자유의 시험대다. 술을 마시는가 마시지 않는가가 아니라, 술이 나의 자유를 넓히는가 좁히는가가 본질이다. 술이 불안을 다루는 기술로 기능할 때, 우리는 불안을 ‘살아낼’ 기회를 잃는다. 반대로 술이 불안을 잠시 드러내어 내가 회피하던 선택을 직면하게 한다면, 술은 실존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결국 술과 예술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술의 도수나 분위기가 아니라, 그 이후의 나이다. 나는 그것을 선택으로 받아들이는가, 변명으로 흘려보내는가. 사르트르의 철학은 이 질문 앞에서 단호하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삶의 저자이며, 예술 또한 그 저자 됨의 가장 치열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