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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디오니소스 정신으로 해석하는 술과 예술의 창조적 긴장

by 아빠띠띠뽀 2026.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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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게 예술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삶을 견디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며, 그 힘의 한 축에는 ‘도취(Rausch)’가 놓인다. 다만 여기서 도취는 단순히 술에 취해 이성이 흐려지는 상태가 아니라, 생의 에너지가 고조되어 감각과 리듬이 증폭되는 생리적·정신적 격정의 상태를 뜻한다. 니체는 그 격정이 인간을 일상의 계산과 도덕적 위축에서 풀어내어, 세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하도록 만든다고 본다. 동시에 그는 알코올이 때로는 창조적 도취가 아니라 피로한 존재가 현실을 잊기 위해 매달리는 마취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도 경계한다. 이 글은 니체의 ‘아폴론적 형식’과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긴장을 축으로, 술이 예술의 탄생에 어떤 방식으로 닿을 수 있는지, 또 언제 그 관계가 퇴행적 의존으로 무너지는지를 철학적으로 정리한다. 결국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술은 예술의 문을 여는 열쇠인가, 아니면 예술가의 손을 무디게 하는 족쇄인가.

 

니체의 디오니소스 정신으로 해석하는 술과 예술의 창조적 긴장 이미지

예술의 두 얼굴: 아폴론의 형식과 디오니소스의 도취

니체의 사유에서 술과 예술의 관계를 논하려면 먼저 ‘도취’라는 말을 일상적 의미에서 떼어내야 한다. 대개 술의 도취는 의식의 흐릿함, 판단의 약화, 말과 행동의 과잉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니체가 말하는 도취는 그와 정반대의 방향까지 포함한다. 그는 도취를 “생의 힘이 밀려 올라오는 상태”로 보았고, 그 힘이 인간에게 더 큰 감각의 예민함, 더 높은 리듬의 긴장, 더 대담한 형상화의 충동을 부여한다고 보았다. 즉 도취는 세계를 잊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더 강하게 ‘만나는’ 상태일 수 있다. 여기서 술은 도취를 유발하는 여러 계기 중 하나로 등장한다. 술은 몸의 온도를 바꾸고, 말의 속도를 바꾸고, 감정의 진폭을 바꾸며, 그 변화는 때때로 창작의 문법을 흔든다. 니체는 바로 이 흔들림 속에서 예술의 탄생을 본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예술을 아폴론적 원리와 디오니소스적 원리의 긴장으로 설명한다. 아폴론은 형태, 경계, 명료함, 절제의 원리이며, 디오니소스는 도취, 합일, 리듬, 넘침의 원리다. 아폴론이 ‘꿈’의 힘이라면 디오니소스는 ‘취함’의 힘이다. 중요한 점은 둘 중 하나만으로는 예술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디오니소스적 에너지가 없다면 예술은 살아 있는 힘을 잃고 도덕 교과서나 박제된 장식으로 기울며, 아폴론적 형식이 없다면 예술은 끝없는 소음이나 무너진 감정의 파편으로 흩어진다. 따라서 술과 예술의 관계를 니체로 읽는다는 것은, 술이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어떻게 불러오고, 그 충동이 아폴론적 형식과 만나 어떤 창조적 형태를 낳는지 추적하는 일이다.

그러나 니체는 ‘알코올 예찬자’가 아니다. 그는 알코올이 삶을 강화하는 도취가 아니라, 삶의 피로를 잊기 위한 값싼 위안으로 쓰일 때 그것을 퇴행으로 본다. 즉 그는 도취 자체를 찬양하되, 도취의 질을 구분한다. 창조적 도취는 세계를 더 깊이 긍정하는 방향으로 힘을 밀어 올리지만, 퇴행적 도취는 세계를 견디지 못해 눈을 감는 방향으로 의식을 가라앉힌다. 술은 이 둘 중 어느 쪽으로도 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술이 예술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단선적 질문이 아니라, 술이 불러오는 도취가 어떤 종류의 도취인지, 그리고 그 도취가 예술적 형식으로 응결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라는 보다 섬세한 질문이다.

 

도취의 철학: 술이 창작을 밀어 올릴 때와 무너뜨릴 때

니체의 관점에서 예술은 삶을 “그대로” 긍정하는 훈련이다. 현실은 고통과 우연, 불완전으로 가득하며, 인간은 그 현실 앞에서 쉽게 위축된다. 도덕은 종종 위축을 미덕으로 포장하고, 사회는 안전한 표정과 안전한 말만을 요구한다. 이때 디오니소스적 도취는 인간을 그 안전장치에서 떼어내어, 삶의 불확실성과 넘침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술자리가 종종 사람에게 과장된 솔직함, 예기치 않은 고백, 돌연한 노래와 춤을 허락하는 것은 그 때문일 수 있다. 여기에는 예술과 닮은 점이 있다. 예술 역시 억눌린 리듬을 끌어올리고, 말로 정리되지 않던 감정을 형상으로 바꾸며,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던 몸을 무대 위로 올린다. 술이 디오니소스적 힘을 깨우는 순간, 창작자는 평소의 자기 검열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결합과 비유, 새로운 리듬을 시도할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니체적 기준에서 “용기”는 단지 무례나 무책임과 동일하지 않다. 도취가 예술이 되려면, 그것은 반드시 어떤 형식의 장악을 필요로 한다. 즉 디오니소스적 에너지는 원초적 재료에 가깝고, 아폴론적 형식은 그 재료를 작품으로 응결시키는 틀이다. 술이 창작의 재료를 풍부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 재료가 작품으로 자라려면 결국 맑은 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니체가 말한 것은 “취한 순간에 작품이 완성된다”는 신화가 아니라, 삶의 힘이 고조되는 순간에 인간이 더 큰 형상화의 가능성을 맛본다는 사실에 가깝다. 그러므로 술과 예술의 관계를 건강하게 이해하려면, 술을 ‘완성’의 도구로 오해하지 말고 ‘재료의 분출’을 돕는 계기로만 제한해 읽어야 한다. 작품은 분출 이후의 정련, 즉 선택과 절제, 반복과 수정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태어난다.

또 하나의 핵심은 도취가 향하는 방향이다. 니체가 경계한 것은 삶을 강화하는 도취가 아니라 삶을 약화시키는 도취, 즉 마취로서의 도취다. 술이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 줄 수는 있지만, 그 망각이 반복될수록 삶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룰 능력은 약해진다. 예술가에게 이는 치명적이다. 창작은 고통을 덮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형태로 바꾸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술이 고통을 ‘가리기’ 시작하면, 예술은 고통을 ‘변형하기’보다 고통을 ‘회피하기’에 봉사하게 된다. 이때 작품은 깊어지기보다 얕아지고, 과감해지기보다 상투적으로 흐르며, 결국 창작자는 더 큰 도취를 찾게 된다. 니체의 언어로 말하면, 이는 생의 긍정이 아니라 생의 부정으로 향하는 길이다. 도취가 힘을 올리는가, 아니면 힘을 빼앗는가. 이 구분이 술의 철학에서 가장 निर्ण निर्ण한 기준이 된다.

그러면 술이 창작을 밀어 올리는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 도취가 ‘시작’의 불꽃에 머물고 ‘지속’의 방법이 되지 않아야 한다. 둘째, 도취가 타인과의 합일을 낳더라도 그것이 폭력이나 강요로 번지지 않도록 윤리적 경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셋째, 도취 이후에 형식을 세우는 맑은 노동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 힘은 방종이 아니라 창조적 넘침이며, 넘침은 형식을 만나야 의미를 갖는다. 결국 술은 예술의 본질이 아니라, 예술이 필요로 하는 어떤 ‘기운의 상승’을 우연히 자극할 수 있는 주변 조건일 뿐이다. 주변 조건을 본질로 착각하는 순간, 술은 예술을 돕는 동반자에서 예술을 갉아먹는 주인이 된다.

 

예술가의 술은 무엇을 긍정하는가: 니체적 기준으로 정리하기

니체로 술과 예술을 읽을 때, 결론은 단순한 금주 권고도 아니고 낭만적 찬양도 아니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훨씬 냉정하고도 정직하다. “그것은 당신의 힘을 늘리는가, 줄이는가.” 니체는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가장 높은 가치로 두었고, 예술을 그 긍정의 최고 형태로 보았다. 그렇다면 술이 예술과 관계를 맺는 방식도 그 기준 앞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술이 삶의 감각을 예민하게 하여 세계의 리듬을 더 깊이 들리게 한다면,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한 변주로 이해될 수 있다. 반대로 술이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게 만들어 의식을 흐리게 하고, 다음 날의 공허와 자기혐오를 반복하게 한다면, 그것은 디오니소스가 아니라 피로한 시대의 마취에 가깝다. 술이 무엇을 ‘해방’하는지가 아니라, 술이 무엇을 ‘강화’하는지가 중요하다.

또한 예술의 관점에서 보자면, 술이 제공하는 것은 대개 ‘내용’이 아니라 ‘상태’다. 취기는 말과 감정의 흐름을 바꾸고, 수치심의 장벽을 낮추며, 관계의 거리감을 변형한다. 그러나 그 상태는 그대로 두면 흩어진다. 예술은 흩어짐을 붙잡아 형태로 만드는 힘이며, 그 힘은 도취가 아니라 훈련에서 나온다. 니체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함께 붙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취 없는 형식은 메마르고, 형식 없는 도취는 소진된다. 술을 통해 얻은 어떤 번뜩임이 진짜 창작으로 이어지려면, 결국 아폴론적 절제가 뒤따라야 한다. 즉, 술은 창작의 “정당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오히려 술 이후의 맑은 시간, 반복과 수정의 시간, 스스로의 과장을 깎아내는 시간이 예술의 진짜 무게를 만든다.

그리고 윤리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니체가 도덕을 비판했지만, 그 비판이 곧 무책임의 면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노예 도덕의 위선과 위축을 공격했지, 타인을 이용하거나 상처 내는 행위를 미화하지 않았다. 술자리는 종종 “진짜 속마음”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적 언어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니체적 기준에서 강함은 타인을 짓누르는 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감당하고 형상화하는 힘이다. 술이 타인을 무너뜨리는 도구가 되는 순간, 그것은 예술적 도취가 아니라 빈약한 권력 욕망의 분출로 전락한다. 예술과 술이 만나는 자리는, 오히려 더 섬세한 책임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감정과 언어가 쉽게 과열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술과 예술의 관계를 니체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술은 예술을 낳지 않는다. 다만 술이 불러온 도취가 생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힘을 밀어 올릴 때, 예술은 그 힘을 형태로 바꾸어 세계에 남긴다. 술이 삶을 강화하는가, 삶을 회피하게 하는가. 그 기준을 잃지 않는 한, 술은 때로 디오니소스적 에너지를 깨우는 작은 불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불씨를 작품으로 만들 책임은 언제나 창작자의 맑은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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