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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자기기술로 읽는 술과 예술: 스스로를 형성하는 실천의 윤리

by 아빠띠띠뽀 2026.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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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예술은 흔히 ‘기분’의 문제로 축소되지만, 미셸 푸코의 관점에서 그것들은 기분을 넘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물음과 직결된다. 푸코는 인간이 어떤 본질을 타고나기보다, 규범·제도·담론·습관 속에서 자신을 해석하고 훈련하며 하나의 주체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술은 단지 취향의 선택이 아니라, 긴장을 풀고 말을 열어주는 도구인 동시에, 감시와 규율의 사회에서 잠시 벗어나는 듯한 ‘허용된 일탈’로 작동하기도 한다. 반대로 예술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삶을 하나의 작품처럼 다루는 자기형성의 실천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술이 자기형성의 기술이 되느냐, 아니면 자기통제의 능력을 약화시켜 외부의 힘에 더 쉽게 휘둘리게 하느냐에 있다. 이 글은 푸코의 권력 이해(규율과 통치성), 고백의 장치, 그리고 ‘자기배려’와 ‘자기기술’의 개념을 통해, 술과 예술이 한 인간의 윤리적 삶을 어떻게 조직하는지 분석한다. 결론적으로 술을 금지할지 허용할지의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술을 둘러싼 실천이 어떤 주체를 만들어내는지, 예술적 실천이 그 주체를 어떻게 더 자유롭게 혹은 더 취약하게 만드는지까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푸코의 자기기술로 읽는 술과 예술 이미지

고백과 규율의 시대에, 술은 왜 ‘작은 해방’처럼 보이는가

푸코의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만 내려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력은 금지와 처벌의 얼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의 규칙, 건강 담론, 성과 평가, 예절과 표준 같은 미세한 장치를 통해 사람들의 몸과 습관을 조율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감시한다. 오늘 얼마나 생산적이었는지, 얼마나 단정했는지, 얼마나 ‘정상적’이었는지 끊임없이 점검하며, 그 점검을 내면화한다. 이런 사회에서 술자리는 종종 예외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말투가 달라지고, 웃음이 커지며, 평소라면 삼켰을 문장이 밖으로 나온다. 술은 규범적 자기관리의 리듬을 잠시 끊는 스위치로 보이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해방’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푸코식 질문은 곧바로 방향을 바꾼다. “그 해방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허용되는가.” 술자리가 완전히 무규칙한 공간이라면 사회는 오래 유지될 수 없다. 오히려 사회는 특정한 방식의 일탈을 허용하고, 그 허용을 통해 긴장을 배출하며, 다시 다음 날의 규율로 복귀하게 만든다. 즉 술자리는 때로 통치의 기술로 포함된다. ‘오늘은 풀어도 된다’는 분위기는 ‘내일은 더 잘해야 한다’는 자기감시로 이어지고, 술자리에서 나온 말과 고백은 관계의 질서를 재편하며 새로운 규범을 만든다. 푸코가 고백의 장치를 중요하게 다룬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은 고백을 통해 자신을 진실한 존재로 확정하려 하지만, 그 고백은 언제나 특정한 규칙과 청자의 권력 아래에서 조직된다. 술자리의 “솔직해져라”는 요구가 때로 폭력적으로 작동하는 이유도, 그 솔직함이 자발성의 이름으로 강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 장면에서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푸코가 말한 ‘자기기술’은 외부의 규율에 무작정 순응하는 것도, 규율을 무작정 파괴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기술은 자신을 다루는 방식 자체를 성찰하고, 그 방식을 바꾸어 더 능동적으로 살아가려는 실천이다. 예술을 창작하거나 감상하는 경험은 종종 ‘자기 해석의 방식’을 바꾼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끌리는지, 어떤 언어와 리듬이 나를 움직이는지 발견하게 된다. 술이 감각을 흔들어 즉각적인 발화를 촉진한다면, 예술은 그 발화를 다시 형식 속에 넣어 숙성시키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푸코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술과 예술을 분리해 도덕적 판정을 내리는 일이 아니라, 술과 예술이 내 삶의 기술로 어떻게 배열되는지, 그리고 그 배열이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드는지 더 취약하게 만드는지 따져보는 일이다.

 

자기기술의 관점에서 본 술: “마신다”가 아니라 “어떻게 자신을 다루는가”

푸코의 자기기술은 ‘자기배려’에서 출발한다. 자기배려는 자기애적 방종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로 구성되고 있는지를 성찰하며 그 구성을 수정하려는 태도다. 이 기준에서 술은 매우 까다로운 대상이 된다. 술은 즉각적으로 몸을 변형시키고, 그 변형은 관계의 규칙과 언어의 규칙을 함께 흔든다. 적정량의 술이 대화를 열어주고 긴장을 완화해 서로의 생각을 더 진지하게 나누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술이 “말하게 하는 장치”로만 작동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말하지 않을 자유를 잃는다. 고백이 미덕이 되고 침묵이 결함이 되는 순간, 술은 자유를 넓히는 도구가 아니라 자유를 좁히는 도구가 된다. 푸코적 관점에서 자유는 단순한 방종이 아니라, 선택의 조건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이다. 술이 그 능력을 빼앗는다면, 술은 일탈의 가면을 쓴 통치의 도구로 변한다.

또한 술은 규율 사회에서 ‘성과의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쉽게 정당화된다. “스트레스를 풀어야 내일 일한다”는 논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그 논리가 반복되면 술은 회복이 아니라 유지 장치가 된다. 즉 술은 피로를 근본에서 다루기보다, 피로를 생산하는 구조에 다시 적응하게 만드는 완충재로 기능할 수 있다. 푸코의 통치성 개념으로 보면, 개인은 스스로 건강과 효율의 관리자가 되고, 술은 그 관리의 일부로 편입된다. 술을 마시는 이유가 즐거움이 아니라 “그래야 버틴다”가 되는 순간,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이미 타자의 논리에 깊이 잠겨 있다. 술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술이 나를 내가 되게 하는가, 아니면 나를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더 매끈하게 만드는가.

그럼에도 술이 자기기술의 일부가 될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다. 푸코가 강조한 것은 규범의 전면 거부가 아니라, 규범을 다루는 방식의 전환이다. 술을 마신다면, 그 술이 무엇을 열고 무엇을 닫는지 기록하고 관찰하는 태도 자체가 자기기술이 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술이 말의 폭력을 강화하는지, 어떤 관계에서 술이 동의의 경계를 흐리는지, 어떤 감정이 술을 핑계로 반복되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반성의 시간’이다. 술자리가 끝난 뒤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술은 단지 소모다. 그러나 술이 내 습관을 드러내는 거울이 되고, 그 거울을 통해 다음 번의 선택이 달라진다면, 술은 통치의 장치가 아니라 자기형성의 자료가 될 수 있다. 즉 술은 삶을 망치는지 여부 이전에, 삶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이 될 수 있다.

예술은 이 지식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형식이다. 푸코가 말한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기”는 화려한 포즈가 아니라, 자기실천의 꾸준한 편집을 뜻한다. 예술적 실천은 감정을 즉시 분출하기보다, 감정을 다듬고 배치하고 지연시키는 법을 가르친다. 술이 즉각성을 강화한다면, 예술은 지연과 형식화를 통해 즉각성의 폭주를 제어한다. 그래서 술과 예술이 만날 때 가장 생산적인 조합은 대개 이렇다. 술은 문턱을 낮추되, 예술은 그 낮아진 문턱에서 나온 것들을 다시 책임 있게 편집한다. 반대로 술이 예술을 “더 흥분하기 위한 배경음”으로 만들면, 예술은 자기기술이 아니라 자극의 연장으로 전락한다. 결국 푸코적 기준에서 술과 예술의 관계는 ‘쾌락의 양’이 아니라 ‘실천의 구조’에 달려 있다.

 

푸코식 결론: 술을 금지하기보다, 술이 만드는 주체를 점검하라

푸코의 철학으로 술과 예술을 함께 바라보면, 결론은 단순한 도덕률로 떨어지지 않는다. “마시지 말라”는 명령은 오히려 권력의 언어를 반복할 수 있고, “마셔도 된다”는 허용은 통치의 완충재로 술을 고착시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술이 내 삶의 리듬을 어떤 방식으로 구성하는지, 그리고 그 구성 속에서 내가 어떤 주체가 되어가고 있는지 묻는 일이다. 술이 나를 더 솔직하게 만든다는 말은 매혹적이지만, 푸코적 관점에서는 위험한 단정이다. 솔직함은 누구에게, 어떤 규칙 아래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 성립하는가. 술이 고백을 강요하고 침묵을 벌주며, 다음 날의 자기혐오를 남긴다면, 그 솔직함은 자유가 아니라 통치의 기술로 작동한 것이다.

예술은 이런 장면에서 대안을 제공한다. 예술은 즉각적 고백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형식으로 옮기고, 관계의 폭력을 직접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폭력의 구조를 보여준다. 푸코가 말한 자기기술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고백의 대상’으로만 두지 않고, ‘형성의 대상’으로 두는 것이다. 술이 나를 외적 자극에 더 취약하게 만든다면, 예술은 나를 더 정교한 감각의 주체로 만들 수 있다. 그 차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다. 나는 어떤 장면에서 무엇을 반복하고 있는가. 그 반복은 나를 더 능동적으로 만드는가, 더 예속적으로 만드는가.

따라서 푸코식 실천은 “술을 줄여라”보다 한 발 더 구체적이다. 술이 관계에서 동의의 경계를 흐리는 순간을 없애고, 술이 피로를 가리는 습관으로 굳어지는 회로를 끊으며, 술이 예술을 소비의 도구로 만들지 않게 배치를 조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감상 전 과도한 음주를 피하고, 감상 후의 대화는 강요가 아니라 선택으로 두며, 취기 속의 말은 기록하되 다음 날 다시 검토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이런 실천은 금욕이 아니라 자기형성의 기술이다. 술을 둘러싼 선택이 ‘규범에 복종하는 선택’이 아니라 ‘자기 삶을 편집하는 선택’이 될 때, 우리는 푸코가 말한 자유의 의미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결론적으로 술과 예술의 관계를 푸코로 읽는다면,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술은 나를 누구로 만드는가. 예술은 나를 누구로 만드는가.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 얼마나 개입하고 있는가. 술이 내 삶을 대신 결정하고, 예술이 그 결정의 장식이 되는 순간, 주체는 약해진다. 반대로 예술이 나의 삶을 비추어 수정하게 하고, 술이 그 수정의 리듬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자리한다면, 술과 예술은 모두 자기기술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결국 자유는 금지의 결과가 아니라, 실천의 구성에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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