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에게 예술은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 자체를 새로 “생성”하는 사건이다. 그는 세계를 고정된 실체의 집합으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연결되고 흩어지는 흐름들의 장(場)으로 보았다. 이때 술의 도취는 단순한 기분 전환이 아니라, 몸과 언어와 관계의 배치를 잠시 바꾸는 하나의 힘으로 읽힐 수 있다. 술이 들어가면 말의 리듬이 달라지고, 감각의 초점이 이동하며, 금기와 습관의 경계가 느슨해진다. 들뢰즈의 개념으로 말하면 이는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다른 경로를 여는 ‘탈주선(line of flight)’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탈주가 창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탈주가 새로운 삶의 구성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그것은 곧바로 더 강한 종속과 반복으로 되돌아오는 ‘재영토화’가 된다. 이 글은 들뢰즈의 욕망, 배치(assemblage), 리좀, 생성, 탈영토화/재영토화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술과 예술의 관계를 분석하고, 도취가 창조적 가능성을 여는 순간과 중독으로 굳어지는 순간을 가르는 철학적 기준을 제시한다.

도취는 ‘기분’이 아니라 배치의 변화다
들뢰즈 철학에서 출발점은 인간을 하나의 고정된 “주체”로 보는 관점에 대한 의심이다. 우리는 흔히 “내가 술을 마신다”, “내가 예술을 창작한다”라고 말하지만,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나’가 아니라 그 순간 작동하는 힘들의 결합이다. 술, 몸의 생리, 함께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 음악의 리듬, 공간의 조명, 말의 속도, 사회적 금기와 기대 같은 요소들이 한데 얽혀 어떤 배치(assemblage)를 만든다. 도취는 이 배치의 조합이 흔들리면서 발생하는 변화이며, 그러므로 도취는 개인의 내면에 갇힌 심리 상태가 아니라 관계의 구성 방식이 바뀌는 사건으로 이해된다. 술이 들어간 자리에서 “평소의 나”가 아니라 “다른 나”가 나타난다고 느끼는 이유도, 본질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배치가 달라져 다른 힘들이 전면에 나오기 때문이다.
예술 역시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들뢰즈는 예술을 설명할 때 ‘표상’을 경계한다. 예술이 현실을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수준에 머물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질서의 복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신 예술은 감각의 새로운 결합을 만들어 “지각(percept)”과 “정동(affect)”의 덩어리를 생성한다. 즉 예술은 우리가 늘 익숙하게 느끼던 감각의 경로를 끊고, 다른 감각의 길을 열어젖힌다. 이때 예술은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생성의 사건이 된다. 술이 도취를 통해 감각의 경로를 흔들 수 있다면, 술과 예술은 동일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이 흔들림은 새로운 감각의 생성으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단지 기존 습관을 더 거칠게 반복하는가.’
들뢰즈는 욕망을 결핍으로 보지 않았다. 욕망은 “없는 것을 채우는 마음”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그런데 술은 종종 욕망을 결핍의 언어로 되돌린다. 술이 없으면 말을 못 하고, 술이 없으면 재미가 없고, 술이 없으면 창작이 안 된다는 식으로 도취가 필요조건으로 굳어지면, 욕망은 생성의 힘이 아니라 결핍의 사슬로 변한다. 그러므로 들뢰즈적 관점에서 술의 핵심 문제는 도덕이 아니라 ‘구성’이다. 술이 새로운 구성으로 이어지는 탈주선이 되는지, 아니면 더 강한 종속으로 회귀하는 재영토화가 되는지, 그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 철학적 과제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술은 창조의 선이 될 때와 중독의 선이 될 때가 다르다
들뢰즈가 말한 탈영토화는 기존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운동이며, 재영토화는 그 벗어남이 다시 어떤 새로운 자리—때로는 더 나쁜 자리—에 고착되는 운동이다. 술의 도취는 탈영토화처럼 보이기 쉽다. 평소에는 말하지 못하던 생각이 튀어나오고, 억눌린 감정이 표면으로 올라오며, 관계의 위계가 느슨해지고, 감각은 더 빠르게 연결된다. 이 순간 술은 삶의 규칙을 잠시 정지시키는 스위치처럼 작동한다. 예술가에게는 특히 이 순간이 매혹적일 수 있다. 검열이 약해지면 시도하지 못했던 문장을 밀어붙일 용기가 생기고, 음률과 색채의 결합이 더 과감해지며, 우연한 연결이 새로운 형식을 낳기도 한다. 술은 “생성”의 문턱을 낮추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뢰즈가 강조하듯, 탈영토화 자체가 선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는가’다. 도취가 단지 더 큰 과장과 더 큰 충동으로 흐르면, 그 탈영토화는 금세 재영토화로 전환된다. 이를테면 술로 풀린 말들이 타인의 경계를 넘고, 다음 날 관계는 손상되며, 죄책감과 피로가 쌓이면, 인간은 그 불편함을 덮기 위해 다시 술을 찾는다. 이렇게 되면 술은 해방의 매개가 아니라 반복의 고리로 자리 잡는다. 탈주선이 새로운 삶의 구성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술-후회-술”이라는 동일한 회로로 굳어지는 순간, 도취는 생성이 아니라 중독의 배치가 된다. 들뢰즈적 언어로 설명하면, 이는 ‘나쁜 탈주선’이다. 겉으로는 도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단단한 감옥을 만든다.
예술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예술이 감각을 새로 만들지 못하고, 자극만을 반복적으로 증폭시키는 형태로 굳어지면, 그것은 생성이 아니라 소모가 된다. 술이 예술의 주변에서 이 소모를 가속할 때가 있다. 취기 속에서 작품은 더 “크게” 느껴지지만, 그 크기는 기억과 수정의 과정으로 정련되지 못하고 파편으로 남는다. 들뢰즈에게 창조는 순간의 번쩍임이 아니라, 번쩍임이 지속 가능한 배치로 연결되는 과정이다. 즉 “새로운 감각”은 결국 새로운 습관, 새로운 리듬, 새로운 작업 방식으로 체화되어야 한다. 술이 그 연결을 끊어버리면, 도취는 아이디어를 주는 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아이디어가 살아남을 토대를 허문다.
그렇다면 술이 ‘좋은 탈주선’이 되는 조건은 무엇인가.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술이 기존 배치를 잠시 흔들더라도 그 흔들림이 더 넓은 생성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열려 있어야 한다. 예컨대 술이 대화를 열어 서로의 감각을 교환하게 하고, 그 교환이 다음 날에도 이어지며, 작업의 방향을 실제로 바꾸는 결정으로 연결된다면, 도취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또한 술이 예술의 결과를 대신하지 않고, 과정의 일부로만 제한될 때 가능성이 열린다. 도취가 ‘필수조건’이 되는 순간, 욕망은 결핍으로 퇴행하고, 재영토화가 시작된다. 결국 핵심 기준은 간단하다. 술이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그 연결이 술 없이도 지속되는가, 아니면 술이 없으면 모든 연결이 붕괴하는가. 전자는 생성의 선이고, 후자는 중독의 선이다.
들뢰즈적 결론: “도취를 평가하라, 그 도취가 만드는 삶의 형태를 보라”
들뢰즈의 철학은 도덕적 설교 대신, 힘의 배치를 평가하라고 요구한다. 어떤 경험이 나를 더 생생하게 만들고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는가, 혹은 나를 더 좁은 반복으로 몰아넣는가. 술과 예술의 관계도 이 기준에서 정리할 수 있다. 술은 예술을 “만드는” 원인이 아니다. 다만 술은 배치를 흔들어 새로운 연결을 잠시 가능하게 할 수 있고, 그 가능성이 예술적 생성으로 전환되려면 반드시 ‘후속 구성’이 필요하다. 취기 속에서 떠오른 문장과 리듬이 다음 날의 수정과 반복을 통과해 형태가 될 때, 도취는 하나의 사건으로 남는다. 반대로 도취가 반복될수록 삶은 더 단순한 회로로 수렴하고, 예술은 더 큰 자극을 요구하며, 관계는 더 잦은 파열을 겪는다면, 그 도취는 나쁜 탈주선이다.
따라서 실천적 태도는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보다 “어떤 배치를 만들 것이냐”에 가깝다. 예술가라면 특히 질문이 더 분명해진다. 술이 내 작업을 넓히는가, 아니면 술이 내 작업을 술에 의존시키는가. 술이 내 감각을 더 섬세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감각을 거칠게 키워 과장만 남기는가. 술이 대화를 열어 공동의 생성으로 이어지게 하는가, 아니면 말의 폭주로 관계를 태우는가. 이런 질문은 금욕의 명령이 아니라, 창조의 조건을 관리하는 윤리다. 들뢰즈에게 윤리란 선악의 판정이 아니라, 삶의 힘을 증대시키는 방향을 선택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들뢰즈적 관점에서 술과 예술의 관계는 ‘도취의 미학’이 아니라 ‘도취의 정치학’이다. 도취가 어떤 삶의 형태를 낳는지, 어떤 관계의 규칙을 만들고 어떤 습관을 고착시키는지, 그 결과로 우리의 가능성이 늘어나는지 줄어드는지 평가해야 한다. 술이 예술의 주변에서 일시적 탈영토화를 제공하더라도, 그 탈영토화가 더 나은 배치로 이어지지 않으면 곧바로 재영토화가 된다. 그러므로 도취를 낭만화하기보다 도취를 분석해야 한다. 술이 만들어낸 ‘선’이 예술의 생성으로 이어지면 그것은 한 번의 사건으로 충분하고, 술이 만들어낸 ‘선’이 반복의 감옥으로 이어지면 그 선은 끊어야 한다. 들뢰즈가 말하듯, 중요한 것은 강도(intensity) 자체가 아니라, 그 강도가 어떤 삶을 구성하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