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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불안과 완벽주의를 낮추는 방식과 숨은 위험

by 아빠띠띠뽀 2026.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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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술을 찾는 이유를 묻는다면, “기분이 좋아져서”라는 대답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경우 술은 즐거움을 더하기보다 불안을 낮추고, 머릿속을 점령하던 자기 검열을 잠시 느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특히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충분히 잘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시작 자체가 어려울 때가 많고, 술은 그 압박을 순간적으로 약화시켜 “일단 해보자”라는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위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불안을 잠재우는 경험이 반복되면,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불안을 ‘마취’하는 방식으로 학습하기 쉽다. 그러면 술은 위로가 아니라 조건이 되고, 불안은 줄어들지 않은 채 술 없이는 버티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 글은 술이 불안과 완벽주의를 낮추는 심리적 경로를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풀어내고, 왜 그 효과가 단기적으로는 달콤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비용이 커질 수 있는지까지 균형 있게 정리한다.

 

술이 불안과 완벽주의를 낮추는 방식과 숨은 위험 이미지

불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덜 느끼게” 만드는 작동 방식

불안은 위험 신호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불안의 핵심은 “위험 그 자체”가 아니라 “위험을 상상하는 능력”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내일 있을 발표, 관계의 갈등, 실패했을 때의 평가, 체면이 무너지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미리 재생될 때 몸은 이미 실제 사건처럼 반응한다. 그래서 불안은 생각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몸의 문제다. 심장이 빨라지고, 손에 땀이 나고, 어깨가 굳으며, 말이 더딘 상태가 된다. 이때 술이 주는 변화는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가 아니다. 술은 몸의 긴장과 사고의 속도를 동시에 ‘느슨하게’ 만든다. 느슨해지면 머릿속 시나리오 재생이 줄어들고, 그 결과 불안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불안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불안이 작동하던 회로의 감도가 낮아진 것이다.

완벽주의도 이 회로와 맞닿아 있다. 완벽주의는 높은 기준을 향한 성실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실패에 대한 공포와 밀접하게 엮여 있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으면 시작하지 말자”,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내놓지 말자”라는 태도는 겉으로는 엄격함이지만, 속으로는 불안을 회피하려는 전략일 수 있다. 여기서 술은 ‘회피를 잠시 멈추게 만드는 약속’처럼 작동한다. 술이 들어가면 기준이 느슨해지고, 작은 흠이 덜 크게 느껴지며, 자기 평가의 목소리가 약해진다. 그러면 사람은 갑자기 말이 잘 나오고, 글의 첫 문장이 찍히고, 미뤄 두었던 연락을 하기도 한다. 이 경험은 “술이 나를 더 나답게 만든다”라는 착각을 강화한다. 그러나 그 ‘나다움’은 대개 실력의 증가가 아니라 자기 검열의 감소에서 온다.

이 점을 이해하면 술과 예술의 관계도 보다 현실적으로 보인다. 술이 영감을 준다기보다, 술이 불안과 완벽주의를 잠시 낮춰 표현의 문턱을 내려주는 것이다. 예술가가 아니라 누구라도, 말과 표현의 문턱이 낮아지면 자신이 더 창의적이고 더 용감해졌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문턱이 내려간 만큼 사고의 정밀함도 함께 내려갈 수 있다. 그래서 술이 불안을 낮추는 방식은 동시에 위험의 씨앗을 품는다. 불안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덜 느끼게 만드는 경험이 반복되면, 불안은 원인 그대로 남아 다음 날 더 크게 돌아오기도 한다. 이 글의 목적은 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술이 제공하는 효과가 “해결”인지 “마취”인지 구분하는 감각을 키우는 데 있다. 그 감각이 있어야 술이 관계와 창작을 돕는 도구로 머물 수 있고, 술이 삶을 지배하는 조건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완벽주의가 술에 끌리는 이유와 그 대가: 억제 감소의 양면성

술이 불안과 완벽주의에 작용하는 핵심은 억제 감소다. 평소의 우리는 끊임없이 “이건 하면 안 된다”라는 브레이크를 밟는다. 그 브레이크는 사회적 규범을 지키게도 하지만, 동시에 시도 자체를 막아 버리기도 한다. 완벽주의가 강한 사람일수록 브레이크가 강하게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은 시작 단계에서 차단된다. 술은 이 브레이크의 압력을 낮춰 준다. 그래서 술은 마치 마음의 안전핀을 잠시 풀어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생기는 첫 번째 이득은 행동의 시작이다. 미뤄 둔 일을 착수하고, 말하지 못한 마음을 표현하고, 가만히 눌러 두었던 욕구를 인정하는 경험이 가능해진다. 이 단계만 보면 술은 분명 도움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두 번째 층의 문제가 생긴다. 억제가 줄어들면 ‘시작’은 쉬워지지만 ‘정교함’은 흔들릴 수 있다. 완벽주의가 강한 사람이 술을 마시고 말을 많이 한 뒤 다음 날 후회하는 장면은 흔하다. 그 후회는 단지 술 때문에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술이 무너뜨린 브레이크를 다시 회복하는 과정에서 자기 비난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완벽주의는 실수에 관대하지 않다. 술로 인해 기준이 내려간 상태에서 한 행동을, 다음 날 다시 올라간 기준으로 평가하면 사람은 자신을 더 잔인하게 재단한다. 그러면 ‘술로 불안을 낮춘 밤’이 ‘불안을 키우는 다음 날’로 이어진다. 이 순환은 술을 더 찾게 만든다. 불안이 커질수록 술이 필요하고, 술이 늘수록 다음 날 불안이 커지는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

또한 술은 주의의 폭을 좁혀 불안을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평소라면 “지금 내가 불안한 이유는 A와 B와 C가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취기 속에서는 “그냥 다 싫다” 혹은 “저 사람이 문제다”처럼 원인이 단순화되기 쉽다. 원인이 단순화되면 감정 표현은 시원해지지만, 문제 해결은 멀어진다. 불안은 대개 구조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준비가 부족하거나, 경계가 흐리거나, 휴식이 부족하거나, 관계에서 역할이 과도하게 부여되거나, 경제적·시간적 압박이 누적되어 있을 수 있다. 술이 주는 완화는 이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술의 진짜 위험은 “불안이 사라진다”는 착시가 “불안을 다루는 기술을 배울 기회”를 빼앗는 데 있다.

완벽주의와 술의 관계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신호는 ‘조건화’다. 처음에는 “가끔 한 잔이면 편해진다” 수준이지만, 어느 순간 “한 잔이 없으면 시작이 안 된다”로 바뀔 수 있다. 예술가의 작업뿐 아니라 발표, 회의, 인간관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불안이 올라올 때마다 술이 해결책으로 연결되면 뇌는 불안과 술을 한 세트로 학습한다. 그러면 불안 자체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술이 없을 때 불안을 더 크게 느끼는 역설이 생길 수 있다. 이때 사람은 “나는 원래 불안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지만, 실제로는 불안을 다루는 경로가 술로 단일화되면서 선택지가 줄어든 결과일 수 있다. 술이 불안을 낮추는 효과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 효과가 반복될수록 불안을 ‘견디는 근육’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점이 핵심적인 위험이다.

 

불안을 낮추는 길을 늘리기: 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바꾸는’ 전략

술이 불안과 완벽주의를 낮춰 주는 경험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 경험은 많은 사람에게 현실이며, 때로는 관계의 문턱을 낮추고 마음을 표현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다만 장기적으로 건강한 방향은 술을 ‘불안의 유일한 해법’으로 두지 않는 것이다. 불안을 다루는 길이 하나뿐이면, 그 길은 쉽게 중독의 길과 겹친다. 반대로 불안을 다루는 길이 여러 개면, 술은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내려앉고 지배력을 잃는다. 그러므로 핵심은 금주 선언의 강박이 아니라, 불안을 완화하는 다른 경로를 의도적으로 확보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짧은 산책과 호흡 조절, 일정한 수면 리듬, 카페나 도서관 같은 공적 고독의 공간, 작은 단위의 목표 설정, 실패를 공유할 수 있는 관계망 같은 것들이 그 경로가 될 수 있다. 술이 해주던 ‘문턱 낮추기’ 기능을 환경과 습관으로 일부 대체하는 것이다.

완벽주의를 다루는 실용적인 요령은 ‘완성’ 대신 ‘진행’을 기준으로 삼는 연습이다. 완벽주의는 결과 기준으로만 자신을 평가하기 때문에 시작이 어렵다. 이때 도움이 되는 것은 “오늘은 100점이 아니라 60점 제출” 같은 명확한 규칙이다. 술이 주는 느슨함을 규칙으로 흉내 내는 방식이다. 또 하나는 ‘다음 날 편집’이라는 분리 원칙이다. 술자리에서 아이디어가 나오거나 말이 풀렸다면, 그 자체를 작품이나 결정으로 확정하지 말고, 다음 날 맑은 정신으로 재검토하는 절차를 습관화한다. 이 절차가 있으면 술은 발화의 계기가 될 수는 있어도, 판단의 주인이 되지 않는다. 결국 불안을 낮추는 데 필요한 것은 기분의 변화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시스템이 있으면 술이 없어도 시작이 가능하고, 술이 있어도 후회가 줄어든다.

마지막으로, 술이 불안을 낮추는 방식의 위험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질문은 이것이다. “불안을 낮춘 뒤, 남는 것이 무엇인가.” 술로 불안을 낮춘 뒤에 작업이 진행되고 관계가 조금 더 건강해지고 삶의 구조가 조금씩 나아진다면, 그 경험은 비교적 안전한 맥락에서 사용된 것일 수 있다. 반대로 술로 불안을 낮춘 뒤에 기억이 흐려지고, 약속이 무너지고, 자기 비난이 커지고, 다시 술이 필요해진다면, 그것은 불안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연기된 것이다.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불안을 다루는 방식으로 삶을 만든다. 술은 그 방식 가운데 가장 빠르고 달콤한 길처럼 보이지만, 빠른 길은 종종 목적지를 바꾸어 놓는다. 불안을 줄이는 진짜 목표는 “아무 느낌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불안을 느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능력이다. 그 능력이 자리 잡을 때, 술은 더 이상 불안의 처방전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향유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술과 예술, 술과 관계는 낭만이 아니라 책임 있는 자유의 영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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