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사람을 더 편하게 만들기도 하고, 관계를 엉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이유를 ‘기분이 좋아서’ 같은 감각적 설명으로만 끝내면 실제 변화의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술이 뇌에서 어떤 신호를 바꾸고, 그 변화가 대화 방식과 판단, 기억, 그리고 관계의 질까지 어떻게 이어지는지 도파민·억제력·기억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봅니다.

도파민: 왜 술은 ‘좋아지는 느낌’을 빠르게 만들까
술을 마시면 분위기가 풀리고 말이 많아지는 경험은 꽤 흔합니다. 이는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라 뇌 보상회로가 빠르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알코올은 뇌에서 도파민 분비에 영향을 주어 ‘보상’과 ‘기대감’을 키우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같은 사람, 같은 공간이라도 술이 들어가면 더 재미있게 느껴지고,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말에 웃음이 크게 터지기도 합니다. 도파민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반복하도록 유도하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즉, 술자리에서 느꼈던 편안함이나 소속감이 강하게 각인되면 다음에도 비슷한 상황을 찾게 됩니다. 문제는 도파민이 ‘관계의 질’ 자체보다 ‘즉각적 즐거움’에 민감하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상대와의 대화가 깊어져서 좋았다기보다 술이 주는 보상감 때문에 “그 사람과 있으면 좋다”로 착각할 여지가 생깁니다. 특히 처음 만난 자리, 긴장감이 큰 상황에서는 도파민 효과가 더 크게 체감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술은 어색함을 줄여주는 도구가 되지만, 동시에 관계 판단을 빠르게 단정 짓게 만드는 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양’입니다. 적당량에서는 도파민으로 인한 긍정감이 대화를 촉진하지만, 어느 선을 넘으면 감정이 과장되거나 흥분이 쉽게 올라옵니다. 기분이 좋아진 만큼 상대를 더 좋아 보이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말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도파민이 만들어내는 과속 감정은 관계의 속도를 잘못 맞추게 해 “우린 친해졌어”라는 확신만 빨리 생기고, 현실적인 이해와 합의는 뒤처지는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
억제력: 말과 행동의 브레이크는 어떻게 느슨해질까
술이 관계에 미치는 가장 큰 변화는 ‘자기 통제’의 감소입니다. 뇌는 원래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기 전에 신호등을 확인하며, 감정을 조절하는 억제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그런데 알코올은 이런 억제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의 효율을 떨어뜨려, 브레이크가 약해진 차처럼 행동을 더 쉽게 내보내게 만듭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이 말은 해도 될까?”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을까?”를 체크하던 사람이 술자리에서는 그 필터가 얇아집니다. 이 변화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집니다. 장점은 솔직함입니다. 숨기던 고민을 털어놓거나, 표현을 미루던 칭찬을 자연스럽게 건네면서 관계가 가까워지는 경험도 생깁니다. 그런데 억제력이 약해진 솔직함은 ‘배려가 담긴 솔직함’이 아니라 ‘그냥 튀어나오는 솔직함’이 되기 쉽습니다. 상대가 듣고 싶지 않은 평가, 과거의 서운함, 쌓인 감정이 마치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며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억제력 저하는 경계 설정에도 영향을 줍니다. 평소라면 지킬 거리, 지킬 선이 술자리에서는 흐려집니다. 스킨십, 사적인 질문, 농담의 수위가 올라가며 “원래 이런 스타일이었나?”라는 오해를 만들고, 다음 날 서로가 민망해지는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또 단체 자리에서는 동조 압력이 높아져 “나만 빠지면 분위기 깨지겠지” 같은 생각이 강해지고, 결과적으로 본인이 원치 않는 속도로 마시거나 행동하게 됩니다. 관계에서 신뢰는 ‘일관성’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술로 억제력이 흔들리면, 평소와 다른 말과 행동이 발생하며 일관성이 깨집니다. 상대는 “어제 한 말이 진심이야?” “평소 모습이 진짜야?”를 고민하게 되고, 그 틈에 불신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술자리는 친해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지만, 같은 속도로 멀어지는 급행열차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핵심은 내가 어떤 상황에서 통제가 흔들리는지, 어떤 말과 행동이 후회로 남는지 미리 알고 조절하는 것입니다.
기억: 술은 왜 ‘좋았던 장면’과 ‘나빴던 장면’을 다르게 남길까
관계를 오래 끌고 가는 힘은 결국 기억에 있습니다. 술자리가 즐거웠다면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 좋았다”가 남고, 불편했다면 “다시는 같이 마시기 싫다”가 남습니다. 그런데 알코올은 기억을 저장하고 회상하는 과정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같은 사건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거나 일부가 비어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이것이 술자리 다음 날 갈등이 커지는 대표적인 이유입니다. 술을 마셨을 때 흔히 말하는 ‘필름이 끊김’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기억 형성이 약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그 순간엔 대화도 하고 웃기도 했지만, 뇌가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는 과정이 흐려져 디테일이 빠집니다. 문제는 디테일이 빠진 자리에 감정만 남는다는 점입니다. “기분은 좋았던 것 같은데 왜 좋았지?” “뭔가 불쾌했는데 뭐였지?” 같은 모호한 감정이 관계 판단을 흔들 수 있습니다. 또 술자리는 ‘자기 서사’를 만들기 쉽습니다. 기억이 빈 부분을 사람은 자연스럽게 추론으로 채우는데, 그 추론은 대개 자신의 감정과 기대를 반영합니다. 내가 불안한 상태였다면 같은 상황도 부정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고, 상대에게 호감이 컸다면 문제 장면을 축소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의 약속, 고백, 폭로 같은 중요한 사건은 다음 날 서로의 기억이 다를 수 있다는 전제를 반드시 깔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술자리에서의 모든 친밀감이 가짜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기억이 불완전할 수 있으니 ‘관계의 핵심 결정’을 술자리 한 번의 분위기로 단정하지 않은 태도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마음이 열렸다면 다음 날 맨 정신으로 한 번 더 대화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제 내가 이런 말을 했는데, 혹시 불편했어?” 같은 짧은 확인만으로도 기억의 공백이 갈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결국 기억은 관계의 기록이고, 술은 그 기록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더 안전하게 친밀해질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술은 도파민을 통해 즐거움을 빠르게 키우고, 억제력을 낮춰 표현을 쉽게 만들며, 기억을 흐리게 해 관계 판단을 흔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술은 친해지는 촉매이기도 하지만 오해와 후회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술자리에서 느낀 감정이 컸다면 다음 날 한 번 더 확인하고, 중요한 약속은 맨 정신으로 정리해 보세요. 그렇게만 해도 술이 관계를 망치는 도구가 아니라, 관계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