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흔히 개인의 기분을 바꾸는 기호품으로만 이해되지만, 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감각의 질서를 흔들고 관계의 규칙을 새로 짜는 “사회적 장치”로도 작동한다. 러시아 문예이론가 미하일 바흐티닌이 말 한 ‘카니발’은 일상 질서가 잠시 전복되는 축제의 시간이며, 그 안에서 위계는 느슨해지고 언어는 과감해지며 몸은 다시 중심이 된다. 술은 이러한 카니발적 시간성을 촉발하는 가장 오래된 매개 중 하나로, 억눌린 말과 웃음, 풍자와 과장의 리듬을 불러내고 공동체가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이 글은 바흐티닌의 카니발론을 통해 술의 미학을 해석하고, 취기가 만들어내는 웃음의 철학, ‘낮은 것’의 존엄, 예술과 일상의 경계 이동,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카니발이 상품화될 때 생기는 윤리적 문제까지 함께 살펴본다.

카니발은 왜 ‘미학’의 사건인가
바흐티닌이 카니발을 이야기할 때 그 핵심은 단순한 축제의 묘사에 있지 않다. 카니발은 평소의 사회가 굳게 붙잡고 있는 질서―지위, 예절, 발화 규칙, 금기―가 잠정적으로 풀리는 예외의 시간이며, 그 예외는 오히려 공동체가 스스로를 비추어보는 거울이 된다. 사람들은 카니발의 한복판에서 왕과 광대의 자리를 바꿔 앉고, 높고 점잖은 언어는 웃음과 풍자 속에서 내려앉으며, 몸과 음식, 배설과 성(性) 같은 ‘낮은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중요한 점은 이 드러남이 천박함의 승리가 아니라, 억눌린 삶의 층위가 공적 장면으로 복귀하는 사건이라는 데 있다. 바흐티닌은 이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논리로 설명했다. 즉, 인간을 정신과 이성의 추상으로만 세우지 않고, 먹고 마시고 웃고 흘리는 몸의 현실 속에서 다시 묶어 세우는 미학이다.
술은 바로 이 카니발적 논리를 촉진하는 대표적 매개로 작동한다. 술이 들어가면 개인의 내면은 곧장 ‘사회적 표정’을 획득한다. 말은 빨라지고, 평소에는 숨기던 감정과 평가가 표면으로 떠오르며, 상호 간의 거리감은 축소되거나 뜻밖의 방식으로 재배치된다. 여기서 술은 단지 감각을 둔화시키는 화학적 물질이 아니라, 시간과 관계의 문법을 바꾸는 촉매다. 일상은 대체로 계산과 절제의 리듬으로 유지되지만, 카니발의 시간은 과장과 낭비, 즉흥과 반복의 리듬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술은 그 리듬을 몸에 새긴다. 누군가는 더 크게 웃고, 누군가는 더 솔직히 말하며, 누군가는 더 과감히 노래하고 춤춘다. 이때 발생하는 미학적 경험은 작품 감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동체 자체가 하나의 ‘장면’이 되고, 참여자들은 그 장면의 배우이자 관객이 된다.
그러나 카니발과 술의 결합을 낭만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바흐티닌의 카니발은 ‘해방’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규범이 잠시 느슨해지는 대신, 웃음과 풍자, 상호 조롱과 자기 희화화가 공동체를 다시 연결하는 방식의 질서다. 술이 카니발을 열어젖히는 순간, 동시에 타인의 취약함을 이용하거나 폭력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술의 미학은 언제나 윤리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본 글은 카니발론을 바탕으로 술이 만들어내는 미학적 장면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 장면이 예술과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경계가 무너질 수 있는지까지 차분히 살펴보고자 한다.
취기, 웃음, 그로테스크: 술이 만드는 카니발적 장면의 구조
카니발의 첫 번째 표지는 ‘웃음’이다. 바흐리닌에게 카니발적 웃음은 누군가를 단죄하는 조롱이 아니라, 세계의 견고함을 풀어헤치는 보편적 에너지에 가깝다. 술은 이 웃음을 촉발하는 데 탁월하다. 취기는 말의 억제를 약화시키고, 지나치게 단정한 표정을 느슨하게 만들며, 삶의 비극성을 잠시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한다. 예컨대 실패와 좌절, 서열과 평가에 짓눌린 일상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진지함’으로 보호한다. 그러나 술자리의 웃음은 그 보호막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이때 드러나는 것은 단지 가벼운 농담이 아니라, 사회가 은폐해 온 감정의 층위다. 카니발적 웃음은 높은 것의 권위를 ‘웃음의 언어’로 낮추고, 낮은 것의 현실을 공적으로 인정한다. 술은 바로 그 낮춤과 인정의 리듬을 몸으로 실행하게 한다.
두 번째 표지는 ‘위계의 전복’이다. 직장, 학교, 가정 등 제도적 공간에서는 호칭과 태도, 발화 순서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러나 술이 개입하면 그 정해진 순서가 흔들린다. 상급자가 농담의 대상이 되거나, 평소 침묵하던 사람이 갑자기 장면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바흐티닌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전복이 영구히 제도를 파괴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카니발의 전복은 ‘잠정적’이며, 그 잠정성 때문에 오히려 공동체는 긴장을 배출하고 자신을 갱신한다. 술자리는 종종 “오늘만큼은”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 문장은 카니발의 표어와 닮아 있다. “오늘만큼은 다르게 말해도 된다”는 합의가 생기는 순간, 관계는 새롭게 구성된다. 물론 이 합의가 강요로 변하면 카니발은 폭력으로 추락한다. 따라서 카니발적 장면의 성립 조건에는 자발성이 필수적이다.
세 번째 표지는 ‘그로테스크’다. 그로테스크는 단순히 기괴함이 아니라, 몸의 경계가 열리고 세계와 뒤섞이는 경험을 뜻한다. 술은 미각과 후각, 열감과 취기를 통해 몸의 감각을 전면으로 끌어올린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입과 목, 위장이라는 구체적 기관을 의식하게 만들고, 음식과 대화, 노래와 제스처를 한데 묶는다. 이때 미학은 시각 중심의 거리 두기에서 벗어나, 참여와 혼입의 방식으로 전환된다. 즉, 술자리의 미학은 “바라보는 미”가 아니라 “함께 휘말리는 미”에 가깝다. 예술사적으로도 카니발의 에너지는 문학과 연극, 음악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었다. 즉흥 연주, 애드리브, 관객 참여형 공연 등은 카니발적 구조를 현대적으로 변주한 사례다. 술은 이러한 즉흥성과 참여성을 강화하며, 장면을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생성 중인 사건’으로 만든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술의 미학은 양면성을 드러낸다. 카니발적 장면은 규칙의 해체를 전제로 하기에, 해체 이후의 책임을 누가 지는지가 중요해진다. 취기는 경계를 흐리게 하며, 흐려진 경계 위에서 타인의 동의가 간과되기 쉽다. 웃음이 공동체를 묶는 힘이 되려면, 그 웃음이 누구를 희생시키는지 성찰해야 한다. 바흐티닌의 카니발적 웃음은 ‘모두가 함께’ 웃는 웃음이지, 특정 개인을 낙인찍는 웃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술의 카니발 미학을 논할 때는, 취기가 만들어낸 솔직함이 곧 진실이라는 순진한 등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취중 발화는 때로 억눌린 감정의 표출이지만, 동시에 타인을 향한 무례의 방출일 수도 있다. 카니발은 전복의 축제이면서도 공동체적 윤리의 시험장이며, 술은 그 시험을 빠르게 앞당기는 장치다.
카니발의 상품화 이후: 술의 미학을 책임 있게 누리는 법
현대 사회에서 카니발은 흔히 ‘이벤트’로 포장되어 소비된다. 축제는 지역 마케팅의 수단이 되고, 술은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필수 장치처럼 배치된다. 문제는 카니발이 본래 지녔던 비판성과 갱신의 힘이, 이 과정에서 무해한 오락으로 평평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바흐티닌의 카니발은 단지 신나는 시간이 아니라, 사회가 숨겨온 균열과 모순이 웃음과 풍자를 통해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상품화된 카니발은 균열을 드러내기보다 감추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즐기자”는 구호는 때로 “생각하지 말자”로 변형되고, 술은 그 변형을 돕는다. 이때 술의 미학은 공동체를 새롭게 묶는 힘이 아니라, 피로를 잊게 하는 마취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술의 카니발 미학을 오늘날 어떻게 다시 살릴 수 있는가. 핵심은 ‘자발성’과 ‘상호성’의 회복이다. 카니발은 누군가에게 강요될 때 즉시 폭력으로 변한다. 술 또한 그러하다. 마시고 싶은 사람과 마시지 않는 사람의 경계가 존중될 때, 비로소 술은 장면을 열 수 있다. 또한 카니발적 웃음은 타인을 낮추어 얻는 우월감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과도한 진지함을 함께 풀어주는 힘이어야 한다. 술자리의 풍자와 농담이 공동체적일 수 있으려면, 말의 방향이 위계를 고정하는 약자를 향하기보다, 권위의 과잉을 겨누거나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비추는 쪽으로 향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 미학의 문제다. 어떤 웃음은 장면을 아름답게 만들고, 어떤 웃음은 장면을 파괴한다.
또한 술의 미학을 예술과 연결해 읽을 때, ‘영감’이라는 단어는 신중히 사용되어야 한다. 술이 감각을 확장하는 순간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 확장은 대개 지속 가능한 창작 윤리와는 별개의 문제다. 바흐티닌적 관점에서 술의 미학은 영감의 신비가 아니라, 관계와 언어가 변화하는 사회적 장면의 미학이다. 다시 말해 술이 예술을 낳는다기보다, 술이 열어젖힌 카니발적 장면이 예술적 형식―즉흥, 과장, 반복, 혼성(混成)의 언어―과 친연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술을 예술의 ‘원인’으로 신격화하기보다, 예술이 발견해 온 카니발의 형식이 술자리에서도 재현될 수 있음을 읽어내는 것이 생산적이다.
마지막으로, 카니발은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돌아갈 때 무엇이 바뀌었는지가 카니발의 성패를 가른다. 술의 미학도 마찬가지다. 취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이 후회와 파편뿐이라면, 그 장면은 미학이 아니라 소모였다. 반대로, 잠시 전복된 자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새롭게 발견하고, 굳어진 관계의 틈을 넓혔다면, 그 술자리는 카니발의 본래 의미에 가까워진다. 술은 공동체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빛이 될 수도 있고, 그림자를 더 짙게 만드는 연막이 될 수도 있다. 바흐티닌의 카니발론은 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술의 시간을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성찰과 갱신의 장면으로 바꾸는 철학적 기준을 제공한다. 결국 술의 미학은 ‘얼마나 마셨는가’가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어떤 관계와 어떤 언어가 가능해졌는가’로 판단되어야 한다.